1)김용(金涌)1557~16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예범(禮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진(璡)이고, 아버지는 찰방 수일(守一)이며, 어머니는 사과(司果) 조효분(趙孝芬)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해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봉교(奉敎), 성균관의 전적(典籍)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正言)·헌납(獻納)·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 등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수행해 많은 활약을 했으며, 교리에 재임 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겨 그를 후원하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해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옮겨졌다. 이 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중앙 관직과 지방 관직을 전전하였다.
일시 제용감정(濟用監正)·세자필선(世子弼善)·집의(執義) 등 중앙 관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지방 관직을 지내면서 오직 백성의 보호와 학문의 진흥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냈다. 그 후 1616년 60세의 나이로 여주목사로 나갔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자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죽었다.
안동 임호서원(臨湖書院)·묵계서원(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천집 雲川集≫·≪운천호종일기 雲川扈從日記≫(보물 제484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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