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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 내의 유일한 노론계 서원이다. 원래의 행정구역은 성주군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고령군이 되었다. 1712년(숙종 38)에 송시열(宋時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성주군은 송시열의 연고지가 아니었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이 거제에서 귀양에서 풀려나 향리로 돌아가는 도중 이곳에 이르실 때 여러 제자들과 노촌들이 나와서 맞이한 곳이다. 그리고 장기에서 거제로 귀양지를 옮길 때도 이곳을 거쳐간 일이 있어서 이곳 사림들이 송시열을 기리기 위하여 영당을 세웠다.
그 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권상하(權尙夏)·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송환기(宋煥箕)를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46년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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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둑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 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