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 면적 약 2400편
건물 총 건평 118평
<사당 3칸, 강당 5칸, 동서제 각 3칸, 누각 5칸, 기타건물 7동>
송암 김면(松菴金沔)은 고령김씨 시조 고양부원군 남득(南得)의 7세손으로서 조부는 문과로 도승지를 지낸 탁(鐸)으로 중종조의 문신이고 부사 세문(世文)의 장자로 1541년(중종36) 고령현의 양전동(量田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총명하여 가학과 가까운 곳에 사는 낙천 배신(洛川 裵紳)에게서 학문을 읽히고 성장하여 퇴계(退溪) 이선생에게서 성리학을 수업하고 남명(南冥) 조식 선생에게서 경의지학(敬義之學)을 공부하였는데 그는 특히 정주(程朱)의 학문에 심취하였다.
김면 선생은 한강(寒岡) 정선생과는 막역지우(莫逆之友)이고 당대 영남의 이름난 선비들과 널리 도의지교(道義之交)로 내왕이 잦았고 친밀히 교우하였다.
김면 선생은 벼슬에 뜻이 없어 오로지 학문연구와 저술로서 평생사로 하였는데 조정에서 효렴(孝廉)으로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유일(遺逸)로서 조월천(趙月川) 정한강(鄭寒岡) 등과 동시에 6품직인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제수하여 부임을 재촉함으로서 나아가서 취임하였다가 곧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처음과 같이 학문연구와 저술과 후진교회에 전념하였다.
김면 선생은 효행이 출천하여 부친 부사공이 북방 경원(慶源) 임소에서 별세하니 6월 염천 임에도 도보로서 천리길에 운구하여 고향 선산에 안장하고 마을 뒷산에 회선태(懷先台)를 축조하고 조석으로 망배함을 평생토록 거르지 않았다.
1592년(선조25) 壬辰 4월에 왜적 수십만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하니 열진(列陳)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관군은 뿔뿔이 흩어지니 적은 불과 15일에 서울에 진격하고 국왕께서는 멀리 북쪽 의주로 파천하시었다.
김면선생은 강개(慷慨)한 사람으로서 “나라가 위급한데 신하된 사람으로서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야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박성(朴惺), 곽준(郭䞭), 박정번(朴廷璠) 등과 더불어 기의(起義)하여 낙동강 연안에서 싸우다가 고령은 소읍이라 뜻을 이루기 어렵다고 큰 고을인 거창(居昌)으로 이진(移陣)하였다.
이때 거창에서는 이미 선비들이 약간의 의병들을 모아놓고 있었다.
이에 김면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문위(文緯), 곽준(郭䞭), 윤경남(尹景男), 류중룡(柳仲龍), 박정번(朴廷璠), 오장(吳長) 등을 참모로 하여 영계(營溪)에 본진을 두고 박성(朴惺)을 수속관(授粟官)으로 하여 군량을 모으고 격문(檄文)을 각 읍에 돌려 의병을 모으니 불과 수일에 2천여의 의군이 모여서 큰 군단이 형성되었다.
이때 적은 낙동강을 그들의 군소보급과 약탈의 통로로 삼아 오르내리고 서이로 진출하여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량보급의 기지로 삼으려고 혈안이었다. 김면 군은 낙동강의 개산포(開山浦)에서 적을 섬멸하고 정진(鼎津)과 무계(茂溪)에서 적을 격파하여 크게 이기고 적의 병선을 나포하여 약탈해 가는 궁중(宮中)의 많은 보물을 노획하여 초유사에게 보내어 행재소에 전하게 하였다.
금산(金山=지금의 김릉)에 집결한 왜적은 남으로 내려와서 거창 함양을 거쳐 전라도로 진출하려고 위세 당당하게 우척현(牛脊峴)에 들어왔다. 이에 김면 군은 산악을 이용하여 군사를 사방에 매복하였다가 일시에 내려치니 적은 혼비백산하여 여지없이 북으로 달아났다. 이 전투에는 거창지방의 산척(山尺=산에서 짐승을 잡고 약초를 캐어 사는 사람)이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또한 이 전투는 임진란 산악전투의 대표적 사례이다.
지례(知禮), 사랑암(沙郞巖), 성주(星州), 두곡(豆谷), 변암(弁巖) 등 크고 작은 30여의 전투를 치르면서 김면은 주야로 갑옷을 벗지 않았고, 혹한의 눈서리에 노출되었으니 사람들이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김면의 군공을 높이 인정하여 8월에 합천 군수를 제수하였으나 나중에 대장이 한곳에 머물 수 없다하여 부임하지 않았고, 9월에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리고 이어서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가 그 공적이 우뚝 뛰어남으로 경상도의병도대장에 특채하여 그 교지(敎旨)에 이르기를 “너를 경상도 의병대장으로 봉하니 도내의 의병을 모두 관할하고 통섭하라” 하셨다.
김면 대장은 감읍하고 더욱 분발하여 적을 무찔렀다. 이듬해 계사년 정월에 조정에서는 김면 대장을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제수하여 관군과 의군을 모두 통솔케 하였다.
2월에 적은 명나라의 원군이 들어와서 평양을 수복하고 겨울을 겪으면서 전세가 불리하니 물러나면서 선산(善山)에 집결하였다. 김면 대장은 적을 섬멸할 계획이 다 이루어졌는데 그동안 쌓인 피로가 겹쳐서 병을 얻어 애석하게도 계사년 3월 11일 금산 진중에서 순국하였다.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은 장계를 올려 “그의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은 맑고 훤하기가 단사(丹沙)와 같았고, 그 가솔이 10리 밖에 있어도 한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장성(長城)이 한번 무너지니 삼군이 모두 눈물을 삼키고 하늘이 돕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하였다.
왕께서는 곧 그 공적을 높이 사서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하였다가 선조 30년에 원종 1등공신에 정헌대부 이조판서를 가증하였다.
송암 김면 선생은 저명한 학자로서 임진왜란에 의분으로 일어서서 적을 물리침에 백성 속에서 백성의 도움을 받아 백성을 위하여 싸우니 그 지지와 도움에 의하여 큰 전과를 올렸고, 기율이 엄정하니 위엄과 존경받은 장수였다. 또한 관군과 관군, 관군과 의군, 의군과 의군사이의 불화를 조정하여 통합을 이룩한 덕장이었다.
그는 몸과 마음을 오로지 흉악무도한 왜적을 물리치는데 다 받쳤다. 그가 임종에 앞서 참모와 장좌들에게 “나와 그대들은 왜적을 물리침에 있어서 오직 나라있는 줄만 알았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다.”(只知有國不知有身) 하였음은 그 애국심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