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곽수강(郭壽岡, 1619~166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포산(苞山). 자는 진옹(鎭翁), 호는 매헌(梅軒). 아버지는 홍점(鴻漸), 어머니는 이천서씨(利川徐氏) 진사(進士) 적(迪)의 딸이다.
8세에 ≪사략 史略≫을 읽고 서계(書契) 이전의 인황씨(人皇氏) 등의 세대(世代)와 년수(年數) 및 그 때의 국도(國都)들은 도저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고 인식하여 선생에게 질문하였고, 12세에 ≪소학 小學≫을 읽고는 사람을 만드는 양서라고 감탄하였다.
16세 때에 성리(性理)와 천리(天理) 및 오행(五行) 등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대한 <천인감응 天人感應>이란 설(說)을 지었으며,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지극하였다. 1654년(효종 5)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58(효종 9)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경의(經義)를 연구하였으며, 이 때 대사성(大司成)이 성균관에 들여 ≪대학 大學≫을 강론(講論)하게 하자, 그 질문에 잘 응답하여 진유(眞儒)라는 칭송을 받았으나 대과(大科)의 응시(應試)에 앞서 죽었다. 저서로는 ≪매헌문집≫이 있다.
2)오선기(吳善基, 1630~170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경부(慶夫), 호는 한계(寒溪).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익전,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 선무랑(宣務郞) 익(翊)의 딸이다. 30세 되는 해에 부친이 그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차례로 당하였는데 효행이 지극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어려운 조카와 종제를 기르고 교육시켰으며, 후진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인간교육을 우선으로 가르치니 많은 학생이 찾아들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항시 성리서(性理書), 공자가어(孔子家語) 등이 놓여 있었고 필법(筆法)도 훌륭하였으며, 근독잠(謹獨箴)을 지어 좌우에 걸어두고 깨우침을 삼았다.
그는 변론하는 학자이기 보다는 실천하는 철인형이었다. 매림서원(梅林書院)·남계사(南溪祠) 등에 봉안 되었다. 저서로는 ≪소학석의 小學釋義≫·≪한계문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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