孤雲 崔致遠(서기 857-?) 선생은 신라때 대학자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호는 해운(海雲) 서라벌(徐羅伐) 육촌중(六村中) 돌산 고허촌장(突山 故墟村長)인 소벌도리(蘇伐都吏)의 이십삼대 손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시다.
선생은 신라 헌안왕(憲安王) 원년(元年) 서기 857년에 태어나 아버지 견일(肩逸)의 교훈 아래 자라다가 12세때 당(唐)나라에 건너가 118세(874년)에 급제(及第)하여 표수현위(漂水顯尉)가 되어 업무에 근면하면서 학문에도 열중하였다.
879년 당나라에서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황소를 격파하여 이름을 높이 떨쳤고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 承務郞 侍御史 內供奉)으로 승차(陞差)되는 한편 26세때는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받았다.
선생은 병도통(兵都統) 고변(高駢) 종사관으로 있다가29세때 본국으로 돌아오려고 희종황제(僖宗皇帝)에게 장계(狀啓)를 올렸진바 사신의 자격을 주었으며 많은 여비와 행장을 주었다.
선생은 본국사신 김인규(金仁圭)와 집소식을 가져왔던 아우 서원(棲遠)와 함께 금의 환향의 길에 올랐다. 풍란으로 기다리다가 29세되던 3월에 귀국하였다.
신라 헌건왕(憲康王)은 시독(侍讀)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감(知瑞監)의 요직을 두었다.
선생은 당에서 지었던 글들을 묶어 계원필경(桂苑筆耕)이라 이름을 붙이고 시집 3책(詩集三冊)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작(著作)이요 높이 평가 받는 책이다.
귀국 후 조정의 인물들이 선생을 시기하여 질투하여 진성여왕때 전북 태인군, 경남 함양군 충남 서산군 태수(太守)로 활동하였다. 나라가 혼란에 빠져 37세 급선무십조(急先務十條)를 왕에 써 올려 여왕도 칭찬하며 신라의 작위(爵位) 중 육위에 가는 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선생은 방란의 길을 떠나니다가 898년 효공왕(孝恭王) 2년 42세 나이로 가솔을 거너리고 가야산(伽倻山)으로 입산하여 은거(隱居)하시다 여생을 보냈다. 고려 현종(顯宗)때에 선생에게 문창후(文昌候)의 시호를 내렸던 것도 그가 유학(儒學)의 최고봉이요 문학의 시조라 존경하여 왔던 것이다.
선생의 란랑비(鸞郞碑) 서문은 화랑(花郞)의 내용을 알려준 보배로운 기록이요 유명한 사산비문(四山碑文) 및 당법장화상전(唐法藏和尙傳)등 명문들은 그 학문이 과연 얼마나 깊었던가를 증거해 보이기도 남음이 있다.
저서 권목(卷目)
사시금체(私試今體) 5수 1권
오언(五言)칠언금체시(七言今體詩) 1백수 1권
잡시부(雜詩賦) 삼십수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 50권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1분 20권
유명한 사산비문(四山碑文)
백월화상비(白月和尙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
숭복사비(崇福寺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