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식吳湜 1370(고려 공민왕 19) ~ 1426(세종8)
조선조 전기의 문신. 태종 때의 제주목사. 자는 위숙(渭叔) 호는 임계(臨溪)이면 본관은울산이고 서울에서 태어났다. 1409년(태종9)남원부사로 재직시 신법령에 “속공노비(屬公奴婢)중 도망자를 본주(本主)가 체포하여 관에 고하면 상을 준다.”고 되어 있었다.그런데 정주목사 이사강(李斯剛)이 조상 전래의 노비를 새로 얻었다고 거짓으로 관청에 고하여 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포멱(捕覓)의 공으로 남원부에 고장(告狀)되자 부사로서 거짓을 살피지도 않고 노비 1구를 상으로 준 것은 혼매남상(昏昧濫賞)의 죄에 해당한다고 의정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1416년 제주목사로로서 제주도 한라산 남쪽 90여리 땅을 동서로 나누어 동쪽을 ‘정의(旌義).서쪽을 대정(大靜)이라고 하여 현을 둘 것을 건의 하였다.
그 뒤 인령부윤(仁寧府尹)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좌군총제(左軍摠制)를 거쳐 경주부윤으로 재직하다가 죽자 세종이 부의(賻儀)를 내렸다.1414년(태종14년) 윤9월.윤임(尹臨)의 후임으로 제주에도임하고 1417년3월에 예조참의로 제수되어 떠났다.세칭 명환(名宦)이라고 칭해졌다.
함께 재임한 제주판관 은 장합(張合)이고 정의현감은 이이(李貽) 대정현감은 유신(兪信)이다.
제주는 동서로 길게 뻗어 방어가 어려우니 제주 목사 오식이 조정에 계청.신남 2백리의 지역을 분할하고 동쪽은 정의현 서쪽은 대정현이라 하여 행정구역을 분리하고 각 현에 현감을 발령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
오식의 묘소는 경북 구미시 무을면 무수동 원성마을에 있으며 또 구미시 고아면 대망동 망장에 있는 경락서원(景洛書院)에 다른 선비 4명과 함께 모셔져 있다.왕조실록에 의하면 1415년 4월 제주의 수조법(收粗法)을 정하였다. 목사 오식의 제청에 따라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한 데다 전세법(田稅法)도 없어 백성이 괴롭게 여기니 토지의 등급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는 하교가 있었다. 같은해 5월 왜선(倭船)23척이 제주를 침법 제주인 송전(宋全)을 시켜 물리치자 송전에게 옷 한 벌을 하사 하였다.
1416년 (태종16년)5월에 제주목사 오식과 전 판관 장합(張合) 등이 사의(事宜)를 올리면서 보고하기를 “제주에 군(郡)을 설치하던 초기에는 한라산의 사면에 모두 17현(縣)이 있었습니다. 북면의 대촌현(大村縣)에성을 쌓아서 본읍(本邑)으로 삼고.동서도(東西道)에 정해진(靜海鎭)을 두어 군마를 모아 연변을 방어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서도(東西道)의 도사수(都司守)는 군마를 고찰하고 겸하여 목장을 책임졌습니다. 지금부터 본읍에는 동도의 신촌현(新村縣).함덕현(咸德縣).귀덕현(歸德縣).명월현(明月縣).을 소속시키십시오.
동도의 현감은 정의현(旌義縣)으로 본읍을 삼고. 토산현(兎山縣).호아현(狐兒縣).홍로현(烘爐縣).3현을 소속 시키며. 서도의 현감은 대정현(大靜縣)을 본읍으로 삼아 예래현(猊來縣).차귀현(遮歸縣)2현을 소속시키십시오.”라고 하혔다.
그리고 “두 곳의 현감이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는 공사(公事)가 있으면 안무사로서의 의견(議見)을 보내어 결정한후에 사연(辭緣)을 보고하게 하여 출척(黜陟)의 빙거(憑據)로 삼으십시오.”하였다.
1416년 7월에 대정.정의 두 현에 수령을 새로 주었다. 동년(1416)9월에 대정현감 박욱(朴彧).정의현감 신치(申緻)에게 부임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노친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골라서 대신하도록 하였다. 제주의 도적을 옥에 가둔 일로 제주목사 오식과 차유선(車宥宣)이 강등되어 벌금으로 죄를 면하고 후일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2) 황필(黃㻶)1464년(세조 10)∼1526년(중종 2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헌지(獻之), 호는 상정(橡亭).
부친은 병조참판에 증직된 황구수(黃龜壽)이며, 모친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486년(성종 17) 약관의 나이로 생진과에 합격하였고, 1492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저작으로 기용되었다. 이어 전적‧감찰 등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의정부사록‧정언‧교리 등을 지냈다. 연산군의 난정이 심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512년(중종 7) 의정부사인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후학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1521년 곤양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뒤에 예주현감‧동부승지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24년 경주부윤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뒤에 사림의 추천으로 경락서원(景洛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상정일고》 3권이 있다.
3) 주부 강거민(主簿康居敏)
세손10손인 신천인이며 호는 강호(江湖), 관(官)은 주부(主簿)이다. 어린시절부터 학문하기를 즐겼고 덕업을 크게 쌓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양아들 심회(沈澮)를 길러 크게 성공시켰다. 이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 뜻으로 강거민이 돌아가시자 심회는 상복하였다. 그리고 강거민의 부인이 돌아가시자 심회는 영의정에서 물러나 시묘살이 3년을 한 것은 너무나 사람들을 감동시켜 효의 본보기로 삼고 있다.
4) 고산 황기로(黃耆老)1521년(중종 16)∼1567년(명종 22).
조선시대의 명필.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매학정(梅鶴亭).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벼슬은 별좌에 그쳤다.
특히,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으로 불렸다. 《근묵(槿墨)》 등에 약간의 진적이 전하며, 《관란정첩(觀瀾亭帖)》‧《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이밖에 현전하는 《고산서첩(孤山書帖)》은 이백(李白)이 쓴 〈회소상인초서가(懷素上人草書歌)〉를 석각(石刻), 탁본한 것으로(1549년 씀.), 필치가 당나라 회소(懷素)의 《자서첩(自敍帖)》중 광초(狂草)를 방불한다. 금석으로 충주의 이번신도비(李蕃神道碑, 1555)가 있다.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초서로는 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아왔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미쳐 비슷한 풍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저서에 《고산집》이 있다. 아우인 황영로(黃榮老)도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5) 훈재 윤홍선
조선 시대 구미 출신의 유생.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백임(伯任), 호는 훈재(塤齋). 형조판서 윤상저(尹尙著)의 후손이며 묵헌(黙軒) 윤희빙(尹希聘)의 증손이다.
윤홍선은 8세에 『소학(小學)』의 대의에 통달하고 오직 학문을 탐구하는 데 뜻을 두었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있는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옮길 때 역사를 담당하였다. 진사에 오른 후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효우(孝友)로써 집안을 가지런히 하였다. 윤홍선은 지역 사회에서 학행(學行)으로 존경받았다. 저서로 『심성도(心性圖)』, 『주자서석씨(朱子書釋氏)』 등이 있다. 경락서원(景洛書院)에 향사되었다. 1983년 서원을 다시 지을 때 봉한리 남계서원(南溪書院)으로 이동시켜 모시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