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해빈(張海濱, 1547~1657)
공은 1575년(선조 7) 태의감 응화(應華)의 아들로 명나라 항주도 금화부 오강현(烏江縣)에서 태어났다. 1597년(선조 30)공의 나이 23세 때 정유재란 때 유격대장 오유충(吳惟忠)과 함께 죄익장(左翼將)으로 조선지원군으로 참전했다.
충주와 죽산에서 싸울 때 선두에 서서 많은 적의 목을 베고 승리하니 전승비가 세워졌으나 안타깝게도 적탄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공은 아픈 몸을 돌보기는커녕 계속 출전하여 울산 증성(甑城)싸움에서도 많은 적을 토벌하였으나 다시 부상을 입게 되었다.
전쟁이 종료되고 같이 왔던 오(吳) 유격장 등이 귀국할 때 공은 전쟁에 다친 상처가 아물지 않아 몸이 아프고, 조국 명이 망할 것 같은데 비해 조선의 미풍양속이 마음이 들어 이곳 군위군 북산리 외진 곳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회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훗날 공의 장자 괴당(槐堂) 덕례(德禮)가 잘 보살펴 잎가 가지가 무성하여지면 명절이나 좋은 날을 골라 나무 밑에 모여 친목을 도모했다고 한다.
공의 활약상을 익히 알고 있던 조정에서는 혜민서(惠民署) 참봉과 다시 율봉도 찰방을 제수했으나 엄숙히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검소하게 살며 고을의 선비들과 교유하기를 즐겼다.
의령 남씨를 맞아 5남 1녀를 두어 당대 내외손이 무려 100여명에 이르니 모두들 중화(中華)마을이라 했다. 공은 신장이 9척이고 말 타기를 좋아했으며, 천문지리, 관상 보는 법, 의술에도 능했다고 한다.
고을의 수령과 안동부사가 괴질에 걸려 백약이 무효했을 때 치료하니 명성이 원근에 알려지면서 많은 병자들이 찾아왔으나 모두 고쳐주었다고 한다.
공은 고국 명나라를 잊지 못해 뒷산에 대명단을 쌓고 황제기일에는 서쪽을 향해 절했다고 한다.
공도 역시 인간인지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없을 수 없었던지 시 한편을 남겼는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삼십년간풍이토(三十年間風異土)에 팔천리외월동휘(八千里外月同輝)라
화음이변명구폐(華音已變明裘弊)하니 수식양강구포의(誰識楊江舊布衣)오
삼십년간이나 이역 땅에서 세월만 보냈는데
팔 천리나 떨어진 저 달빛은 한결같이 다 같구나
고향나라 소식도 끊어지고 고향의 의복 풍속 다 변했으니
돌아간들 그 누가 나를 절강 사람으로 알아주리오.
1657년(효종 8)년 돌아가시니 향년 82세 당시로서는 장수하셨다. 사림의 공의에 의해 1684년(숙종 10)북산서원에 제향 되었고 1751년(영조 27)왕명으로 후손들의 부역이 면제되었다.
1892년(고종 29)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 훈련원사에 증직이 내려지고 같은 날 부인 의령남씨가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2000년 통계에 의하면 1,076가구 3,300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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