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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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산서원(龍山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
   최진립(崔震立)
   1699년(숙종 25)
   1711년(숙종 37)
   2월 하정(下丁)
   경상북도기념물 제88호(1993.02.25지정)
본 서원은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을 향사하기 위해 1699년(숙종 25)에 경주부윤(慶州府尹) 이형상(李衡祥)이 지방유림과 함께 건립하였다. 1711년(숙종 37)에 ‘숭렬사(崇烈祠)’로 사액되었는데, 이 때 유림이 모여 용산서원으로 할 것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훼철(毁撤)령으로 훼철되었고 1924년에 중건(重建)·복향(復享)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하정(下丁 : 세번째 丁日)과 8월 하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최진립(崔震立, 1568~163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득정(得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순릉참봉 삼빙(三聘)이고, 아버지는 신보(臣輔)이며,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참봉 사종(士鐘)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계종(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 수백명을 인솔하고 서생포(西生浦)의 적을 격멸한 데 이어 양호(楊鎬)·권율(權慄)과 함께 도산(島山)에서 대승하였다.
1600년 여도만호 겸 선전관(呂島萬戶兼宣傳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1607년 도총도사에 제수되자 비로소 관직에 나갔다. 뒤에 울산에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사면되어 가덕첨사(加德僉使)를 제수받았다.
경흥부사·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인조 8) 경기수사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하였다. 1634년 전라수사를 거쳐서 1636년 공주영장으로 병자호란을 맞자 감사 정세규(鄭世規)를 따라 참전하여 용인 험천(險川)에 이르러 청군을 만나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저서로는 ≪정무공기실 貞武公紀實≫ 2권이 있다.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47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경주의 숭렬사(崇烈祠), 경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서원의 배치(配置)는 전면(前面)에 강학공간(講學空間)이 중심(中心)이 되는 민고당(敏古堂)을 세우고 배면(背面)에 제향공간(祭享空間)인 숭렬사(崇烈祠)를 둠으로써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방법을 택하였다. 우측(右側)에 관리사(管理舍)를 두어 서원을 보살피게 하고 서원입구 우측에 신도비각(神道碑閣)을 세웠다.
 
1)사당
사당인 숭렬사(崇烈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다. 공포는 이익공 구조이며 익공의 장식이 화려하다. 평면은 전면에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장대석 기단에 원형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올렸다. 사당의 우측에 3칸 규모의 ‘一’자형 편면의 전사청을 배치하였으며 평삼문이 신문으로 사용된다.
 
 
2)강당
강당인 민고당(敏古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공포는 초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5량가의 건물이다. 혼합식 기단에 원형초석을 두고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평면은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온돌방 1칸을 두었다.
 
3)기타
고직사 영역의 건물은 공포는 민도리이며 가구는 3량가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포사는 정면 5칸 규모로 평면은 1칸 마루를 중심으로 우측에 방 한칸, 좌측에 방 두칸을 배치하였다. 유사실은 정면 2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집으로 뒤편에 툇간을 두어 저장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주사는 정면 3칸 규모로 평면은 방 2칸에 부엌을 배치하였다. 창고는 2칸 규모의 ‘一’자형 평면이다.

용산서원 내에 있던 기타 문적과 유물은 충의당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고문헌은 7종 23책으로 수는 그리 많지 않으며,
참고-경북서원지
문화재청
경주시 문화관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