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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서원은 강설(姜渫), 강여호(姜汝痺) 두 선생을 추모하여 도남서원 원장 김기찬, 사양서원 원장 이동필, 병산서원 원장 도유사 이제, 매림서원 원장 박민국, 낙봉서원 원장 김태온, 동갈서원 원장 장수훈등 555명의 영남내의 서원과 유림의 제현이 1804년(순조 4) 12월 6일부터 1806년(순조 6) 9월 3일에 걸쳐 발의하여 공사를 시작한지 5년 뒤인 1811년(순조 11)에 준공하여 강당을 자양강당(紫陽講堂)이라하고 사우를 상의사라고 하였다. 1840년(헌종 6)에는 사당인 ‘연봉사(蓮峰祠)’를 건축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이 내리자 ‘문명재(文明齋)’라 개칭하였으며 1927년 중수 복원하고 강석구(姜碩耉), 강이화(姜履和)를 추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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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설(姜渫, 1583~1651)
조선 인조 때 의병장으로 자는 정보(淨甫), 호는 남와(南窩), 본관은 진주이다. 김천 찰방 강부의 손자로서 충남 회덕에서 출생하여 1612년(광해군 4)에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기호지방 선비들의 의병장으로 추대받은 바 있다. 1628년 김산에 낙향하여 지금의 구성 광명리에 거처를 정하고 한강 정구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특히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김산향교를, 1634년(인조 12) 대성전과 명륜당을 향내 유림의 협조를 얻어 재건하고 유지를 받들어 아들 강여구가 동·서재와 묘문을 복원하였다.
2)강여호(姜汝痺, 1619~168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계숙(啓叔), 호는 기재(耆齋). 아버지는 진사 설(渫)이며, 어머니는 여대로(呂大老)의 딸이다.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을 거쳐 판결사를 지냈다. 함경도 종성부사로 있을 때 임금이 그의 직언을 요청하자, 시폐(時弊) 수천언을 문장으로 진언하였다.
청렴결백하여 물품을 주고받을 때에는 반드시 의(義)로 하였으며 봉급에 남는 것이 있으면 친척에게 나누어주었다. 종성부사의 임기를 끝내고 돌아올 때의 소지품은 침구(寢具)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만큼 청렴하였다고 한다.
3)강석구(姜碩耉, 1632~169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위망(渭望). 목(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홍중(弘重)이고, 아버지는 급(寫)이며, 어머니는 정회원(鄭恢遠)의 딸이다. 1663년(현종 4) 통덕랑의 신분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3년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다음해 정언을 거쳐 지평에 승진한 뒤, 직강의 관직에 있으면서 진위사(陳慰使)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675년(숙종 1) 이후 장령·헌납·사간·집의에 여러 차례 임명되면서 1678년까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정치적 입장은 남인에 속하며, 숙종 초년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이 대립할 때에는 윤휴(尹頊)를 중심으로 하는 청남을 편들어 탁남의 허적(許積)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4)강이화(姜履和)
조선후기의 학자로 하는 호운(湖雲), 본관은 진주, 여구(汝榘)의 현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