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언신(鄭彦信, 1527~159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 걸(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손(洪孫)이고, 아버지는 예조좌랑 진(振)이다. 어머니는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부윤 확(確)의 딸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1571년(선조 4)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전라도도사·장령·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이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나가 변민(邊民)을 잘 다스리고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풍족하게 비축하였다. 이어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1582년(선조 16)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막하로 이순신(李舜臣)·신립(申砬)·김시민(金時敏)·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했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그 뒤 역가문서(逆家文書) 가운데에 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었다.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그 곳에서 죽었다. 1599년에 복관되었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2)남영(南嶸, 1548~1616)
본관은 의령, 자는 사수(士秀), 호는 고산(孤山)으로 은(誾)의 5대손이다. 유성룡, 이정귀의 천거에 의해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에 제수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1646년(인조 24)에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었다. 함창의 아곡정사(雅谷精舍)에 제향되었다.
3)심대부(沈大孚, 1586~165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신숙(信叔), 호는 가은(嘉隱)·범재(泛齋). 광종(光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천군수 의검(義儉)이고, 아버지는 경기도 관찰사 대(岱)이다. 어머니는 전라감사 최홍한(崔弘淹)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23년(인조 1) 선행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기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중림찰방(重林察訪)을 거쳐, 1630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32년 형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관직에 있으면서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이 때 이미 사사(賜死)된 인성군(仁城君)의 세 아들이 절도에 위리안치된 것을 왕이 관용을 베풀어 방면하자 이에 찬성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반대파의 탄핵으로 보령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34년 송화현감(松禾縣監)이 되었는데, 가도(假島)에 진을 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사가 여러 고을을 횡행하며 민폐를 끼치자, 이들 대표와 횡포를 금하는 조약을 엄중히 체결하여 민폐 방지에 공헌하였다. 뒤에 서로(西路)의 행정이 부패한 데 혐오를 느껴 한때 사직했다가 다시 복직하였다.
이어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38년에는 또다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해 삼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삼남도사 겸 진정사를 택정할 때 경상도사로 뽑혔으며, 이어서 수찬·헌납(獻納)·종부시정을 지냈다.
1643년 성산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응교(應敎)·시강관(侍講官)·필선(弼善) 등을 역임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사간으로서 유계(兪棨) 등과 조(祖)자의 묘호를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회양으로 귀양갔다가 1657년에 풀려났다. 이 해에 죽었는데, 사후 신원되었으며,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4)김낙춘(金樂春, 1525~1586)
자는 태화(泰和), 호는 인백당(忍百堂), 본관은 순천으로 이황의 문인이다. 1545년(인종 1)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 응하지 않은 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중년에 재상 이준경이 천거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문경으로 이거하였다. 소양동(瀟陽洞)에 영류정(暎流亭)을 짓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