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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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삼계서원(三溪書院)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152-2
   권 발(權 橃)
   1588년(선조 21)
   1660년(현종 1)
   2월, 8월 중정(中丁)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17호(2002.02.14지정)
과거 닭실마을로 오르는 초입부분 우측편에 자리하고 있는 삼계서원(三溪書院)은 조선 중종때 명신 권발(權橃)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안동부사였던 김우옹이 1588년(선조 21)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1601년(선조 31)에 한강 정구(鄭逑)가 사당을 충정공사(忠定公祠), 당호를 정일당(精一堂), 동재를 사무사(思無邪), 서재를 모불경(母不敬), 정문을 환성문(喚惺門), 문루를 관물루(觀物樓)라 각각 명명하였다.
그리고 1660년(현종 1)에 삼계서원으로 사액받았다. 고종 5년(1868)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충정공사·환성문·관물루가 훼철되었다가 1951년에 복원하였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권발(權橃, 1478~154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송정(松亭). 안동출생.
할아버지는 부호조(副護早) 곤(琨)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영의정 사빈(士彬)이며, 어머니는 주부(主簿) 윤당(尹塘)의 딸이다.
1496년 (연산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상변(上變)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계(堂上官階)를 삭탈하도록 청해 직신(直臣)으로 이름을 떨쳤다.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고, 그뒤 호조정랑이 되었으나 얼마 뒤 영천군수가 되었다. 1517년 장령을 역임하고, 1518년 승정원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와 예문관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 예조참판에 임용되었다.
이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 뒤 아버지가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음을 들어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15년간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龍讓衛副護軍)에 임명되었고, 밀양부사를 거쳐, 1537년 12월 한성부좌윤, 이듬해 2월에는 경상도관찰사, 10월에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39년 3월에 병조참판에 임용되고, 6월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7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1540년 병조판서·한성부판윤에 임용되었으며, 1541년 5월 예조판서, 11월 의정부좌참찬에 임용되었다. 1542년 5월 장령이 되었으며, 1544년 정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1545년(인종 1년) 5월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고, 같은해 7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 (院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해 8월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허자(許磁)·임백령(林百齡) 등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尹任) 세력을 배척하자, 이에 반대해 윤임·유인숙(柳仁淑)·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였다.
곧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었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나, 9월 우의정 이기,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해 삭훈되었고,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547년 양재역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처음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朔州)에 이배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는 재직기간 동안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참찬관(參贊官) 등으로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중종조 조광조·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개혁 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567년 신원(伸寃)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는독서를 좋아해 ≪자경편 自警篇≫과 ≪근사록 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 저서로는 ≪충재선생문집≫ 9권 5책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서원은 정연한 전학후묘의 배치법을 지니고 있으며 공간의 위계성이 돋보인다. 관물루와 사당은 복원된 건물로 당시의 모습은 지니지 못하고 있으나 동재와 서재에서 당시의 모습을 부분적이나마 찾을 수 있다. 또한 닭실마을과 연계되는 삼계서원의 위치와 충재선생의 인물사적 측면과 더불어 고려할 때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서원 출입은 전면에 자리하고 있는 중층의 관물루 아래에 설치된 환성문으로 들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강당이 자리하고 전면 좌우에 동·서재가 있다. 강당 우측으로 돌아들면 토담장으로 공간이 구획된 제향공간인 사당(충정공사)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재 좌측편에 서원을 관리하는 관리사가 대문채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동재 전면 우측에는 1906년 사림에서 세웠다는 신도비와 비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원 좌측에 관리사가 있다.
 
1)강당
강당은 4자 정도로 기단을 높게 축조한 후 전면 4칸 측면 2칸으로 세웠다. 외진기둥은 모두 원형이며 평면은 좌측 전후 2칸 온돌방을 두고 우측 6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일반적으로 서원 강당인 경우 중당협실형의 평면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이나 여기서는 도산서원 강당인 전교당과 평면구성이 동일하다. 좌측 온돌방은 전면 기단 쪽에서 바로 오를 수 있도록 쌍여닫이문을 두었으나 출입문이라기보다는 창으로 기능이 더욱 높은 듯하며, 마루와는 전면 쪽에는 쌍여닫이 명장지문을 설치하고 배면 쪽에는 전면문보다는 다소 높이가 높은 쌍여닫이 맹장지문을 두어 문에 의한 출입방법이나 부분적 공간이용법 또한 위계의 차이점을 두지 않았나 생각된다. 방의 천장은 고미반자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마루는 전면 쪽에 4분합들문을 설치하였으며 그 상부에 교창을 두어 원형은 아닌성 싶으나 확실한 관계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배면부분과 측면은 판벽과 쌍여닫이 판문을 설치하였으며 하부에는 머름을 두었다. 입면은 무익공 소로수장에 판대공을 세운 장식성이 없는 5량구조로 간결하다. 사우(四 隅)에 활주를 세웠으며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2)사당
사당인(충정공사(忠定公祠))는 1951년 복원된 건물로 전퇴를 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앞쪽으로 4자폭의 퇴칸을 두고 그 뒤로 장마루를 깐 3칸을 통칸으로 하여 충재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창호는 전면에 매칸 궁판을 끼운 쌍여닫이문을 설치하였으며 회분벽하여 깨끗하다. 전면만 원주를 세우고 그 상부는 우익공 소로수장으로 처리하였으며, 뺄목 뒷뿌리는 초각을 하였다. 퇴량은 대량과 내진주 위에서 합보되고 바로 위에 양봉을 두고 종량을 얹었다. 전체적으로 후기의 건축수법이 완연하다.
 
3)동·서재
동재는 전퇴칸을 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건물이다. 좌측으로부터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고 전면에 쌍여닫이 판문이 설치된 폐쇄형 마루방을 설치하고 우측편으로 2칸통 온돌방을 두었다. 어칸은 출입문으로 사용한 듯 높이가 높은 궁판을 끼운 외여닫이문을 두었고 우협칸은 쌍여닫이 세살문을 두었다. 온돌방으로의 출입은 다소 출입이 편하도록 측면과 배면 쪽에도 두었으며 우협칸 측면에 아궁이를 두었다. 굴도리 5량구조로 규모에 비해 상부구조를 크게 잡았으며 홑처마 박공지붕이다. 서재의 규모와 형식은 동재와 동일하나 전면 창호구성법이 다소 차이가 있다. 우협칸은 심벽에 쌍여닫이 판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가운데 설주가 세워져 있으며 좌협칸의 온돌방 창호에도 설주가 남아있다.
 
4)관물루
관물루는 근년에 복원된 중층건물로 2층기둥까지는 철근콘크리트구조이며 주상부는 목구조를 얹은 일종의 절충식 구조법을 지니고 있다. 일층 어칸에 대문을 설치하였을 뿐 그 나머지부분은 모두 개방되어있고 이층부분은 강당 쪽은 개방되고 전면부분은 쌍여닫이 판문으로 폐쇄하였으며 양 측면 역시 벽채로 막았다. 기둥상부는 무익공 소로수장형식을 택했고 5량 판대공에 박공지붕이다.
 
5)기타
1906년에 건립된 신도비와 비각은 단칸 건물로 주변은 비가 잘 보이게 홍살을 세웠고 원주에 이익공양식의 건물이다. 사우에 활주를 세웠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나 양식이나 수법은 후기의 것으로 세밀하지 못하다.

삼계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근사록(近思錄)책판, 「눌은선생문집(訥隱先生文集)」책판 등 총 10종 790장의 책판과 현판은 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 중이다.

참고-경북서원지
문화재청 http://www.cha.go.kr/
봉화군 문화관광 http://tour.bonghwa.go.kr/
사이버 한자 http://www.cyberhanja.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