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김강(金鋼, 1609~1669)
자는 치정(致精)이며, 호는 오수(迕叟)이다. 생원 이선(履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의 후손인 참의 윤검(允儉)의 따님이다. 1635년(인조 12)에 생원이 되었다. 그는 성균관 유생으로 병자호란을 맞았다. 재종형과 함께 5성(五聖)의 위판을 남한산성까지 봉안함으로써 명망을 얻었다. 강직하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품을 가졌다. 영남유생을 대표한 소수이기도 한 덕망과 학행이 높았던 당세의 학자였다. 향년은 61세이고, 배위는 경주손씨이다. 『오수실기(迕叟實記)』가 전하며, 서문은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가 지었으며, 행장은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이 짓다. 행계서원에 제향되다.
2)김홍제(金弘濟, 1661~1737)
자는 도겸이며, 호는 북벽(北壁)이다. 아버지는 굉(鍠)으로 문절공 담의 7세손이다. 척당유고(倜黨有高)한 학자로서 출사 할 것을 단념하고 은거하여 뜻을 구하며, 학업에 정진하여 사림의 사표로서 명망이 높았다. 저서로 『북벽문집(北壁文集)』이 있으며, 두암(斗庵) 김약련(金若鍊이 서문을 짓고,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가 행장을 짓다. 백부인 강(鋼)과 더불어 행계서원에 제향되다.
* 김홍제 일화
北壁 金弘濟 선생의 자는 道兼으로 眞率한 성품에 늘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나물밥으로나마 끼니를 잇기 어려웠고, 頭巾대신으로 繩巾(새끼를 꼬아 머리를 묶음)을 매야 하는 몹시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늘 스스로 즐거워했다고 한다.
하루는 집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가 주인이 없어 둘러보고 너무나 어려운 형편인지라 미안한 마음에 돌아서서 가는데,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던 북벽 선생께서 이를 보시고 돌아서 가는 손님을 맞이하여 묵게 하고, 조금도 스스럼없는 談笑와 自若하게 대함에, 손님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청빈한 북벽선생을 이웃 마을 풍산김씨 집안에서 새로 집을 짓고 낙성식에 초대를 하였다. 入鄕한 후 크게 번성한 풍산김씨 집안에서 새로 지은 집은 100여간으로 고래등같았다고 한다. 초대받은 가난한 선비 북벽선생은 말 대신 소를 타고 갔는데, 잔칫상이 펼쳐진 대청 마루로 소를 몰아 오르려고 하였으며, 소는 발버둥을 치며 오르려하지 않았고, 이에 북벽선생은
" 소도 오르려하지 않는 집에 어찌 사람이 살수 있겠는가? 곧 집을 헐어 재목을 멀리 버리고 이 터에 잔디를 깔아 본래대로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김씨문중에 재앙이 닥칠 것이다"
라고 말하고는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풍산김씨 집안에서는 이상하게 여겼지만 북벽선생이 시키는 데로 하였다.
며칠 후에 御命을 받은 差使가 이 마을로 들이 닥쳤다. 나라의 허락도 없이 대궐같은 집을 지은 자를 역적죄로 잡으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집을 허물은 뒤라 풍산김씨 집안은 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풍산김씨는 북벽 선생을 恩人으로 여기고 先見之明이 높은 道學者로 尊敬하였다고 한다.
晩年에 북벽선생은 杏溪 북쪽 절벽 아래에 거처를 마련하여 삼원당(三願堂)이라 하고, 못을 만들고 주위에 솔을 심어, 때로는 혼자서 거문고를 타며 지냈는데, 새들이 날아와 어깨에 앉으니, 실로 處士의 높은 風致가 있었다고 하며, 이에 주위 사람들은 그를 북벽거사(北壁居士)라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杏溪書院(:물야면 수식리 720-2)은 순조4년(1804년)에 설립하여 生員 汚수(늙은이 수) 金鋼, 處士 北壁 金弘濟 두분을 祭享하였으나, 고종5년(1868년) 國令으로 毁撤되었다가, 1931년에 復設하고 校理公(懷松軒 金 증:물이름 증)을 追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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