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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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옥천서원(玉川書院)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776
   이사룡(李士龍)
   1793년(정조 17)
   1796년(정조 20)
   음력 3월 중정(中丁)
   
옥천서원은 조선 인조시대의 청나라의 강압에 의해 대명(對明)전쟁에 파견된 조선군으로 참전했다가, 임진왜란 때의 명의 구원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며 공포(空砲)를 쏘다 청군에게 발각되어 참살당한 의사(義士) 이사룡(李士龍)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성산이씨의 집성촌인 윗봉산마을 가장 안쪽의 산록 넓은 터에 위치하고 있다.
1793년(정조 17)에 이사룡을 성주목사에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하사했으며, 1796년(정조 20)에 그를 모시는 사우(祠宇)가 “충렬사(忠烈祠)”로 사액되었다.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었으며, 이후 그의 직계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윗봉산마을에 있던 가묘(家廟)가 그 역할을 대신하다가 1919년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처음 이사룡을 위해 건립되어 사액되었던 충렬사가 있었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작촌마을에는 현재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옥천서당이 건립되어 있으며, 그 앞쪽에 “대명충신조선의사성산이공지유허(大明忠臣朝鮮義士星山李公之遺墟)”라 새겨진 마름모꼴 단면의 유허비와 근래에 후손들이 세운 유허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최근에는 경상북도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본 서원의 배향인물인 이사룡의 역할은 조선후기에 이루어진 숭명사상의 중요한 하나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학적으로 매우 주목될 수 있다고 판단되며, 또 지금까지의 문화재지정은 최상급의 양반들에 관한 것들이 많이 지정되어 왔음을 감안해 볼 때 서민은 아니더라도 서민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양반층의 언행(言行)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자료로서 판단되어 경상북도에서 기념물로 지정하게 되었다.

1)이사룡(李士龍, 1595~1641)
조선 후기의 의사(義士). 본관은 성주(星州). 자(字)는 사중(士中)이다. 할아버지는 수문장 유문(有文)이며, 아버지는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위한 공으로 무과에 오른 정건(廷建)이다.
1640년(인조 18)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포사(砲士)로 징발되었는데, 금주(錦州)에서 명장(明將) 조대수(祖大壽)와 대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은혜를 생각하고 공포(空砲)로 응전하였다. 이를 본 동료가 적극 말렸으나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다면서 듣지 않았다.
끝내 청군에게 발각되어 잡혀가서 칼로 위협을 받았으나 청장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굴하지 아니하니, 이 때 우리나라 장령(將領)들이 청장에게 용서를 빌어 살려주기로 허락을 받았는데도, 그는 웃으면서 스스로 죽음을 청하여 의롭게 죽었다.
청장들이 비록 그를 죽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높은 절의에 크게 감탄하였다. 뒷날 칠포만호·성주목사에 추증되고, 성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성주 옥천서원은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산이씨들의 집거지로서 그 중 윗 봉산마을 안쪽의 산록에 충렬사(忠烈祠)와 충의재(忠義齋)가 함께 위치하고 있다.
이들 건물은 17세기의 인물인 이사용을 제향하는 서원으로서 충의재와 동·서재, 솟을삼문의 튼 ‘ㅁ’자형 일곽, 그 후방으로 지대를 한 단 높인 충렬사, 그리고 우측편에 가묘(家廟)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6개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대명충신조선의사성산이공지유허(大明忠臣朝鮮義士星山李公之遺墟)”라 새겨진 마름모꼴 단면의 유허비와 근래에 후손들이 세운 유허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 경북서원지
해피뉴스 대구/경북 http://www.yninews.com/
성주군 문화관광 http://sjmelon.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