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여희림(呂希臨, 1481~155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대지(大之). 호는 원정(圓亭). 성주 출생. 성종 때 원종공신이며 감역인 우창(遇昌)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우의정 이용(利用)의 손녀이며, 목사 현정(顯廷)의 딸이다.
18세에 용봉산(龍鳳山)에 있는 절에 들어가 도형(都衡)·이광(李光)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는데, 그 해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이 화를 당하자 이에 과거볼 생각을 단념하고 사림(士林)으로서 지냈다.
당시 그는 도학과 문장으로 크게 명성이 나 있었으며, 김안국(金安國)·소세양(蘇世讓)·정사룡(鄭士龍) 등과 교우관계를 가졌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도의로 교우를 맺었다.
1510년에는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변역(變易)·소장(消長)의 이치에 관해 문답, 서로 계합한 바 있다. 1516년에는 고향에 내려가 주자(朱子)가 가감, 증보한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시행하였다.
그 이듬해 정광필(鄭光弼)의 추천에 의해 불차탁용(不次擢用)으로 복성군(福城君)의 사부가 되었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가 설치되자 그의 형 희단(希端)과 함께 천거되었으나 응시를 거절, 기묘사화에 화를 면하였다.
1533년 김안로(金安老)가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폐하고 복성군을 연일(延日)로 귀양보낼 때 전일에 사부를 지냈다는 이유로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가 함평에 이배 후 풀려났다. 1538년 다시 등용되어 지평에 이르렀다. 성주의 천곡사(川谷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적 등을 수록한 ≪원정실기≫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