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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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청천서원(晴川書院)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532
   김우옹(金宇顒)
   영조 5년(1729)
   
   
   청천서당-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61호(1991.5.14지정)
1729년(영조 5) 사림에 의해 김우옹(金宇顒)을 봉향(奉享)하기위해 청천서원(晴川書院)을 창건하였다. 고종 때 대원권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된 후, 김우옹의 후손인 김호림(金頀林)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으로 중건하였다.
서원이 창건된 이후에는 회연서원(檜淵書院)과 함께 성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사림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서당으로 중건된 이후 1910년 봄에 주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교육구국운동으로서 서당을 수리하여 성명학교(星明學校)라 부르고 후진의 양성을 위한 교사(校舍)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1992년에는 대가면 칠봉리 산중턱에 유림과 후손들의 힘으로 위치를 옮겨 현재의 건물로 복원되었다. 서원은 널찍한 마당에 산뜻한 나무건물로 들어서 있으며 현판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이다. 서원정면에는 연못과 구름다리, 갖가지 모양의 바위와 꽃나무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청천서원에서 나와 고가들이 즐비한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청천서당이 나온다. 청천서당은 일제시대에 성명학교 교사로 사용되면서 애국계몽운동의거점이 되기도 한다. 청천서당은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되어 있다.

1)김우옹(金宇顒, 1540~160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성주(星州) 출신. 아버지는 삼척부사 희삼(希參)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73년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그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했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 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해,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쳐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처의 외할아버지인 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관직에 나아가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책을 진언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평소에 몸이 약한 관계로 선조로부터 내의원을 통한 약을 하사 받기도 하였다.
1573년 부수찬으로서 경연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 이념과 위정자의 정치 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 공부(主敬工夫)를 논해 왕의 정신 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 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 聖學六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정지(定志)·강학(講學)·경신(敬身)·극기(克己)·친군자(親君子)·원소인 (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氓),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瑄)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청해 이의 실현을 보았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학령(學令)·독법(讀法)·치경행재(置經行齋)·택사유(擇師儒)·선생도(選生徒)·공사(貢士)·취사(取士)의 <학제칠조 學制七條>를 손수 지었다.
선학을 존경해 1573년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했으며, 이듬해에는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사액을 내릴 것도 청하였다.
1579년에는 이이(李珥)를 비난하는 정언 송응형(宋應泂)에 맞서 이이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또한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해 1574년에는 정구(鄭逑)를 천거하고, 1595년에는 곽재우(郭再祐) 등 33인을 천거하였다.
관직 생활 중 수시로 시무책을 올렸는데, 1594년 6월 <시무칠조>, 7월에 <시무사조>, 9월에 <시무팔조>, 이듬해 <시무십육조>, 1597년에는 여지 (勵志)·택상(擇相)·택장(擇將)·임관(任官)·연병(鍊兵)·적량(積糧)·신상(信賞)·필벌(必罰)의 <중흥요무팔조 中興要務八條>를 올렸다.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에 속하였다. 그래서 서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이징(李澂)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이에 대해서만큼은 존경의 태도를 취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에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동강집 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 經筵講義≫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서원
산중턱에 위치하여 돌계단을 올라가면 외삼문은 수정문(守正門)이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에는 청천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이 서원의 강당인 일중당(一中堂)이 위치하고 강당과 외삼문 사이 좌우로 동·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강당 뒤로는 사우가 위치하고 있다. 그 외에 장판각이 있다.
 
2)청천서당-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61호(1991.5.14지정)
서당은 장방형 토석담을 두르고 서쪽에 정면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기와로 된 서당을 배치하였으며, 그 전방에 3칸 대문채와 남쪽에 3칸 일자형(一字形) 관리사가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서당 담장 밖 북쪽에는 김우옹의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이 방형(方形) 토석담 안에 자리하고 있다.

청천서원(晴川書院) 장판각에는 속자치통감강목판목(續自治通鑑綱目板木)이 보관되어있는데, 동강이 기축옥사(己丑獄死,1589)로 함경도 회령(會寧)에 유배되었을 때 저술한 글을 판각(板刻)한 것이다. 판목의 재료는 배나무로 제작되었고 규격은 대략 25×34cm로 모두 673매이다.
초고(草稿) 상태로 전해오다가 1771년(영조 47) 왕명에 의해 내각활자(內閣活字)로 처음 출간되었으며, 목판본은 1808년(순조 8) 왕명을 받은 사림의 주선으로 청천서원에서 목판을 새겨 출간하였다.
속자치통감강목(續自治通鑑綱目)은 36권 2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송나라 태조 원년(960)부터 명나라 태조 원년(1368)까지 408년간의 중국역사를 적은 것으로 조선시대 주자학 연구의 심화와 함께 대의명분과 정통론을 강조하는 사림의 역사의식이 잘 반영된 서적이다.

참고-성주군 문화관광 http://sjmelon.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