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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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천곡서원(川谷書院)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성주 명간방(明澗坊) 운곡(雲谷) 즉 현재의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세워진 서원으로 가정(嘉靖) 무오(戊午) 즉 조선 명종 13년(1558)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이 지역의 향현(鄕賢)인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腹),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세 분을 모시기 위하여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기미(己未) 즉 명종 14년(1559)에 후임목사 황준량(黃俊良)에 의해 완공되어 그 이름을 영봉서원(迎鳳書院)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후 지역에서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과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腹)에 대하여 진상(眞像)에 묵주(黙珠)를 쥐고 있다는 이유로 논란이 거듭되어 서원의 옆에 충현사(忠賢祠)라는 사당을 짓고 두 분을 배향(配享)하였다.
 
영봉서원(迎鳳書院)은 여론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자 한강(寒剛) 정구(鄭逑)가 삼국지(三國志)의 와룡고사(臥龍故事)를 인용하여 이천(伊川)이 정이(程頤)를 운곡(雲谷)이 주희(朱熹)를 봉안한 땅의 이름과 우연히 같은지라 도학의 연원을 따라 김굉필(金宏弼)만을 종향(從享)하겠다고 하고, 서원의 이름도 주변을 흐르는 이천(伊川)의 천(川)과 지역의 이름인 운곡(雲谷)의 곡(谷)을 따서 천곡서원(川谷書院)이라 고쳤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당시 목사 황준량(黃俊良)이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보면 이황도 묵주(黙珠)로 인한 후일의 시비로 인하여 양위[兩位,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 ·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가 폐출되는데 대하여 아쉬워하면서 그 부당함을 말하고 있고, 자신이 쓴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와 현실이 맞지 않다고 하여 돌려줄 것을 청하고 있다.
 
선조조에 사액(賜額)을 받았고, 인조 계해(癸亥) 즉 인조 원년(1623)에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를, 임오(壬午) 즉 인조 19년(1642)에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을 종사(從祀)하였다.
 
서원 곁에 1558년 충현사를 세워 문열공 이조년, 문충공 이인복, 문충공 이숭인을 향사하고, 1658년(효종 9년), 향현사를 세워 지지당 김맹성, 행정 도형, 원정 여희림, 충숙공 송희규, 칠봉 김희삼, 대암 홍계현을 향사했으나 1868년에 모두 철폐되었다.

1) 이조년(李兆年, 1269년 ~ 1343년)
고려의 원종-충혜왕 때의 문신·시인·문인이며 학자이다.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아버지는 경산부(京山府) 이속(吏屬)인 장경(長庚)이다. 장인은 정윤의로 경산부에 부임해서 그의 사람됨을 보고 사위로 삼았다. 1294년(충렬왕 20)에 향공진사로 급제한 후 안남서기(安南書記)·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협주지주사(陝州知州事) 등을 거쳐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1306년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 왕유소(王惟紹)·송방영(宋邦英)의 이간으로 충렬왕·충선왕 부자간 다툼이 치열했는데 이조년은 진퇴(進退)를 삼가하고,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억울하게 연루되어 유배를 당했다. 유배 후 13년간은 고향에서 은거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심왕(瀋王) 고(暠)가 왕위를 넘보자 발분(發憤)하여 홀로 원나라에 가 왕의 정직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충숙왕이 환국한 후 감찰장령·군부판서 등을 역임했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숙위(宿衛)시 방탕하게 생활하므로 경계의 말을 간곡히 올리자 왕이 담을 뛰어넘어 달아났다고 한다. 충혜왕이 왕위에 올라 정당문학예문대제학직을 내리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했다. 충혜왕의 방탕을 보고 충정으로 간했으나 듣지 않자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죽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로 시작되는 시조 1수를 남겼다. 오늘날 전하는 고시조 가운데 자주 애송되는 것으로, 잠못 이루는 밤의 심정을 자연을 통해 표현한 절구(絶句)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2) 이인복 [李仁復] 1308(충렬왕 34)~ 1374(공민왕 23).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극례(克禮), 호는 초은(樵隱). 할아버지는 성산군(星山君) 조년(兆年)이며,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포(褒)이고, 동생이 인임(仁任)이다. 백이정(白頤正)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326년(충숙왕 13) 문과에 급제하여 복주사록(福州司錄)이 된 후 춘추공봉(春秋供奉)에 발탁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대녕로금주판관(大寧路錦州判官)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기거주(起居注)로 승진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후 우부대언(右副代言)·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했고, 서연(書筵)에서 진강했다. 이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1354년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가 되었고, 이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1356년 원나라가 기씨(奇氏) 제거와 변방 침범을 용서하자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에 〈고금록 古今錄〉을 편찬했다. 1359년 수사공 상서좌복야 어사대부(守司空尙書左僕射御史大夫)를 거쳐 이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첨의평리(僉議評理)·삼사우사(三司右使)·서북면도찰군용사(西北面都察軍容使) 등을 역임했다. 1364년 찬성사(贊成事)로 단성좌리공신(端誠佐理功臣)에 봉해졌고,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민왕이 복위한 것을 알리고 돌아와 정동행성좌우사낭중(征東行省左右司郎中)이 되었으나, 왕에게 신돈(辛旽)을 멀리할 것을 간하다가 파직당했다. 이듬해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1371년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이색(李穡)과 함께 〈금경록 金鏡錄〉을 증수했다. 1373년 검교시중에 이르렀다. 평생 성리학을 존숭하여 불교를 멀리했고, 성품이 강직하여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노기가 얼굴에 나타났으나 함부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문장을 짓는 데 말이 엄하고 뜻이 깊어 기롱하고 풍자하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초은집〉이 있다. 1375년(우왕 1)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 김굉필 [金宏弼]. 1454(단종 2)~ 1504(연산군 10).
본관은 서흥(瑞興). 어렸을 때의 이름은 효동(孝童)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의 딸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경기도의 성남(城南)·미원(迷原)과 야로(冶爐:처가)·가천(伽川:처외가)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손(金馹孫)·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 등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누가 혹 시사(時事)를 물으면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답할 정도로 〈소학〉에 심취했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一身)의 청정적멸(淸淨寂滅)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척불(斥佛)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다. 1486년 당시 이조참판으로 있던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올려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사제지간에 사이가 벌어졌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하여 남부참봉이 된 뒤, 전생서참봉·군자감주부·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소학〉을 배운 것은 이때의 일이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順川)으로 옮겨졌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 등의 상소로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4) 정구 [鄭逑]. 1543(중종 38)~ 1620(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경학(經學)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 통달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배출되어 영남 남인학파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아버지는 사중(思中)이다.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했다. 7세 때 〈논어〉·〈대학〉을 배워 뜻을 통했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밑에서 공부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64년 상경하여 과거장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돌아와 그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1573년(선조 6) 예빈시참봉에 이어 1578년 사포서주부, 그뒤 삼가·의흥·지례 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에 부임했고, 이때 베푼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이듬해 지평이 되고 동복현감을 거쳐 1585년 교정청(校正廳)의 교정랑(校正郞)으로서 〈경서훈해 經書訓解〉를 교정했다. 1591년 통천군수가 되었는데,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 군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뒤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목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했다. 고향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경학을 비롯해 산수·병진(兵陣)·의약·풍수·역사·천문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에 뛰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영남학풍을 계승했는데, 그의 〈심경발휘 心經發揮〉는 이황의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심경〉을 중요시한 이황의 학문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는 정호(程顥)·정이(程)·장재(張載)·사마광(司馬光)·주희(朱熹)의 예설을 분류한 것으로 예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예를 통하여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국가생활을 이롭게 한다는 도덕지상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예기상례분류 禮記喪禮分類〉·〈가례집람보주 家禮集覽補註〉·〈오복연혁도 五服沿革圖〉·〈심의제도 深衣制度〉 등도 예학에 관한 저술들이다. 이밖에 역사서로 고금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정치의 득실과 그 요체를 밝힌 〈고금충모 古今忠謨〉·〈고금치란제요 古今治亂提要〉 등이 있으며, 〈고금인물지 古今人物志〉·〈고금명신록 古今名臣錄〉 등과 같은 전기류도 있다. 안과 의서인 〈의안집방 醫眼集方〉과 산아와 육아에 관한 〈광사속집 廣嗣續集〉도 저술했다. 수령을 맡을 때마다 그 고장의 산천·물산·고적·인정·풍속 등을 조사·수집하여 7종의 읍지를 간행했는데, 그중 〈함주지 咸州誌〉가 남아 있다.
그밖의 저서로 〈한강집〉·〈성현풍 聖賢風〉·〈태극문변 太極問辨〉·〈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무이지 武夷志〉·〈곡산동암지 谷山洞庵志〉·〈와룡지 臥龍志〉·〈역대기년 歷代紀年〉·〈고문회수 古文會粹〉·〈경현속록 景賢續錄〉·〈관의 冠儀〉·〈혼의 婚儀〉·〈장의 葬儀〉·〈계의 稧儀〉·〈갱장록 羹墻錄〉 등이 있다.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성주 동강서원(東岡書院)·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 학령서원(鶴翎書院), 통천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다. 제자로는 이후경(李厚慶)·서사원(徐思遠)·황종해(黃宗海)·허목(許穆) 등이 있는데 이들은 김성일(金誠一)·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하와 함께 영남 남인학파를 이루었다. 한편 그의 사상 가운데 경세론 분야는 허목 등 근기학파(近畿學派)에 속한 학자에게 계승되어,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 등에 의해서 더욱 심화·발전되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잘 썼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5) 장현광 [張顯光]. 1554(명종 9)~ 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주자학자.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으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을 주장했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이씨(京山李氏)이다. 1576년(선조 9) 재사(才士)로 천거되었고, 1595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보은현감을 지냈다. 그뒤 형조좌랑·순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광해군 때 합천군수, 인조 때 지평·집의·이조참판·대사헌·지중추부사 등에 20여 차례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진압된 후 부름을 받아 인조에게 정치에 대한 건의를 했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군에 격문을 보내 근왕(勤王)의 군사를 일으켰다. 이듬해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죽었다.
 
한강(寒岡)을 천곡서원(川谷書院)에 종향(從享)할 때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두 선생에게 고유한 글

대도를 거듭 밝혀 / 重明大道
긴긴 밤에 다시 해가 뜨니 / 長夜復日
옛 성인을 잇고 후학을 열어 준 위대한 사업 / 繼開偉業
전후에 똑같습니다 / 前後揆一
빛이 해외에 입혀지니 / 光被海外
우러르기를 일월처럼 하옵니다 / 仰若兩曜
이미 여러 현자들을 진열하여 / 旣列諸賢
문묘의 뜰에 배향하오니 / 廡享文廟
지명을 보고 생각을 일으켜/ 地名興思
특별히 서원을 높였습니다 / 別崇院學
천과 곡에 / 川焉谷焉
완연히 유적을 생각하여 / 宛想遺躅
마치 문정에 나아가는 듯하옵고 / 如就門庭
마치 궤와 자리를 받드는 듯하옵니다 / 如承几席
지방의 유현(儒賢)을 종사(從祀)하오니 / 從以鄕儒
또한 이루어진 법식이 있습니다 / 亦有成式
오랑캐와 중화가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가니 / 夷夏同天
도가 어찌 고금에 다르겠습니까 / 道豈今昔
근래에 정공은 / 近有鄭公
일찍이 스스로 사숙하와 / 早自私淑
마음을 원대함에 두고 / 存心遠大
몸을 법도로 다스렸습니다 / 律己繩墨
연원을 찾아 / 尋究淵源
준적이 있음을 알았으며 / 知有準的
본원을 건설한 것은 / 本院建設
실로 공의 계획에서 나왔습니다 / 多公規畫
올바른 학문을 높이고 숭상하며 / 宗尙正學
심오한 뜻을 표장하였습니다 / 表章奧義
당에 오를 만하니 / 可擬升堂
어찌 장석(丈席)에서 모심과 다르겠습니까 / 何殊丈侍
사체가 올려 종사함이 마땅하오니 / 事宜躋從
사람들은 이의가 없사옵니다 / 人無異議
이에 길한 때를 점쳐 / 玆卜吉辰
제사 올림을 아뢰옵니다 / 告以卽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