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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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덕천서원(德泉書院)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사우당 김관석, 사봉 김천택, 퇴은 김즙, 운암 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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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우당 김관석
김관석의 자는 의중(倚中), 호는 사우당(四友堂)으로 아버지는 장사랑 金允迪(김윤적)이다.. 조선 중종조의 학자로서 경학(經學)을 바탕으로 한 도의(道義)를 강마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서당을 세워 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며, 『독서명문도편(讀書銘聞道篇)』을 비롯한 도학(道學)과 관련한 적지 않은 저술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은 효성스러운 천성에 德(덕)을 갖추었으며 學問(학문)에 정진하여 京鄕(경향)에 칭송되더니 死後(사후)에 德泉書院(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처음으로 성주군 수륜면 倫洞(윤동)에 터를 잡았다.
 
2)사봉 김천택
자는 대형, 호는 사봉, 본관은 의성, 관석의 손자, 담로의 아들로 수륜면 수륜동에서 출생했다. 한강 정구의 제자로 가야산 북쪽 기슭에 집을 지어 학문에 전념하고 1585년(선조 18년), 사마시에 합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버이를 두 아들에게 의탁하고 의병을 일으켜 홍의 장군 곽재우와 더불어 왜병과 싸우며 화왕산성을 지키기 4년, 성중에서 돌아갔다. 임종에 두 아들에게 "부모를 끝까지 보양하지 못하고, 적을 소탕하지 못하고, 자식을 성취시키지 못한 것이 세 가지 큰 한이다"라고 하였다.
 
3) 퇴은 김즙
 
4) 운암 김주
계곡 장유(張維)가 지은 한강선생 문인 운암(雲巖) 김주(金輳)공 묘갈명
고 예조 정랑 김공 묘갈명(故禮曹正郞金公墓碣銘) 병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로부터 몇 년 동안 전란이 종식되지 않자 인사들이 대부분 강도(江都)로 피난을 갔는데, 김지원(金志遠) 공(公) 역시 영남에 있다가 이곳에 이르렀다. 그러자 석전(石田) 성중임(成重任 성로(成輅). 석전은 호이고 중임은 자임)과 석주(石洲) 권여장(權汝章 권필(權韠))이 공을 만나 그지없이 기뻐하면서 마침내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내가 당시 어린 나이에 그 풍도를 듣고는 마음속으로 나름대로 사모했었는데, 조금 자라 철이 들 무렵 다행히 여러 어른들을 따라 노닐다가 김공과 교분을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공을 보면 맑고 담박하며 천연 그대로의 기상이 우러나오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존경스러운 마음만 들 뿐이다.
기사년에 내가 나주(羅州)로 좌천되어 내려갔을 때 공은 이미 먼저 무안현(務安縣)의 수령으로 와 있었는데, 나주와 무안은 서로 경계를 접하고 있는 가까운 지역이었다. 이에 공이 나의 도착 소식을 듣고는 말을 달려와 회합하였는데 서로들 만나 보고 기쁜 나머지 그 뒤로 자주자주 서로 찾아보곤 하였다.
공은 본래 술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공을 만날 때면 반드시 술자리를 베풀곤 하였는데, 공은 취할 때까지 술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었다. 공은 당시 파리하게 병든 몸으로 수저를 멀리한 채 오직 맛좋은 탁주를 들며 아침과 저녁 식사를 대신하곤 하였는데, 청경(淸勁)한 기상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으며 강직한 논조의 담화 역시 들을 만하였다.
이듬해에 내가 부름을 받고 돌아올 때 공 역시 관직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갔는데 때때로 소식을 전하며 서로 안부를 묻던 중 금년 봄에 이르러 홀연히 공의 부음(訃音)을 듣게 되었다. 이때 내가 시를 지어 공의 죽음을 애도하였는데, 그중에 한 구절을 소개하면 ‘한평생 청고(淸苦)하게 지낸 분이니 어찌 비린내가 범접하게 하였으랴.[都將氷蘗供身世 肯許羶腴染肺腸]’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 뒤 한참 세월이 흐르고 나서 공의 자제들이 어떤 이를 통해 비갈명을 써 달라고 나에게 부탁해 왔다. 내가 병든 몸이라서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문자를 짓지 않고 있었으나 오직 공에 대해서만은 사양할 수가 없었다.
공의 휘(諱)는 주(輳)요, 지원(志遠)은 그 자(字)이다. 대대로 성주(星州)에서 살았는데 그 선조는 해평인(海平人)이다. 시조 훤술(萱述)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운 분으로 관직이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6대조 수(洙)는 예조 판서로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고, 조부 휘 경(璟)은 문과 출신으로 현감이고, 부친 휘 응곤(應袞)은 벼슬하지 않았고, 모친 안강 노씨(安康盧氏)는 사인(士人) 홍도(弘道)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호) 정 선생(鄭先生)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뜻이 독실하여 학업에 힘을 쏟았으므로 정 선생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왜구(倭寇)가 영남 지방에 가득히 들어차자 공의 온 집안이 호남으로 피난하였다. 그런데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와중에 양친이 모두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상례를 예법대로 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일컬었다.  
그 뒤 호남에도 역시 병란이 파급되자 마침내 강도(江都)에 들어가 있던 중 을사년의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고, 강도에서 10여 년 동안 거주하다가 비로소 옛날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수석을 차지하기도 하는 등 명성이 더욱 퍼져 나갔다.
 
광해(光海) 때에 성주(星州)의 사자(士子)가 금고(禁錮)되는 변을 당하면서 화가 장차 한강(寒岡)에게 미치려 하자 공이 향리 사람들을 위해 소를 작성해서 해명해 주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찍이 상소를 올려 정인홍(鄭仁弘)의 죄악이야말로 죽여야 마땅하다고 논하였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강경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공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금상(今上)이 즉위하고 나서 인사 행정을 주관하는 자가 공이 훌륭하다는 소문을 듣고는 여러 차례 관직에 의망(擬望)하였으나 임명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마침 조정에서 성주 인사들이 오래도록 금고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특별히 은과(恩科)를 베풀었는데 공이 수석으로 발탁되었다. 이에 직부 전시(直赴殿試)의 특혜가 내려져 마침내 갑자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공의 나이가 이미 61세였다.
 
그 뒤 성균간 전적으로 단번에 뛰어오른 다음 누차 공조와 예조의 좌랑으로 옮겨졌으며, 정랑으로 승진하면서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였다가 뒤이어 무안 현감(務安縣監)으로 외방에 나갔다. 그곳에서 공이 행한 정사야말로 마치 물처럼 맑아 원 노산(元魯山)과 양 도주(陽道州)를 연상케 하였는데, 이는 모두 내가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들이다. 해직되어 돌아올 즈음 공의 행리(行李)를 보면 쓸쓸하기 그지없었는데 집에 돌아와서도 오막살이 한 채나마 비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했으므로 친척과 고구(古舊)들이 힘을 합쳐 수선해 주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예조 정랑과 종묘서 영(宗廟署令)에 제수되었어도 모두 응하지 않다가 병자년 2월 4일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73세였다. 이해 5월 모일에 모지(某地) 모산(某山)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으니, 이는 선영의 예를 따른 것이었다.
공은 사람됨이 화평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그 청렴결백함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모습을 보면 무척이나 야위어 입고 있는 옷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조와 행실만은 확고하기 그지없었으며, 평소에는 근신하며 부드럽게 대하면서 남의 잘못을 입에 올리지 않다가도 정작 이해(利害)를 따지고 시비(是非)를 가려야 할 때에 이르러서는 공에게서 뺏을 수 없는 늠연(凜然)한 점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읊조리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서 스스로 운암거사(雲巖居士)라는 호를 지어 가졌고, 일찍이 소나무 3그루를 손수 뜰에 심고는 그 찬(贊)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헌(旅軒) 장공 현광(張公顯光)이 성산지(星山志)를 써 달라고 공에게 부탁하였는데, 마침 병이 드는 바람에 글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공은 야성 송씨(冶城宋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감찰 섭(涉)의 딸로서 2남 5녀를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하정(夏鼎)과 은정(殷鼎)이고, 장녀는 주부 여형(呂炯)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 4명의 사위 이름은 나상경(羅尙褧), 도신휘(都愼徽), 황담(黃䨵), 이두제(李杜齊)이다. 측실의 아들 한정(漢鼎)은 아직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물에 씻어 희게 한 건 / 浴之使白者
먹칠하면 검게 되고 / 可黔而黑
맑게 해 깨끗한 건 / 澂之使淸者
흐리게 하면 탁해지지 / 可汨而濁
누구랴 김공처럼 / 孰如金公
원래부터 해맑은 이 / 天然皎潔
아는 이 드물어 더욱 귀한데 / 知希益貴
내가 그 실상 드러내노라 / 我著其實
 
故禮曹正郞金公墓碣銘 幷序
自壬辰倭難。數年兵不解。人士多避地江都。而金公志遠。亦自嶺南至。石田成重任,石洲權汝章。得公驩甚。遂爲莫逆友。余方童年。聞其風而心竊慕焉。稍長省事。幸從諸長者游。因得交金公。見公淸淡
任眞。愈久而愈可敬也。歲己巳。余貶官羅州。而公已先宰務安縣。羅與務接壤。公聞余至。馳來會焉。相見懽然。自是數
數相就。公素嗜酒。余不飮。每遇公必置酒。公爲擧白至醉。公時羸病却匕筋。唯以醇醪代饔飧。而淸勁不少衰。談議侃侃
可聽。明年。余被徵還。公亦解官歸鄕里。時時寄聲相問。今年春。忽得公訃。以詩哭之。有都將氷蘗供身世。肯許羶腴染
肺腸之語。久之。諸孤因人以碣銘見屬。余病矣。久不爲人作文字。唯於公不能辭。公諱輳。志遠其字也。世居星州。而其
先爲海平人。始祖萱述。佐麗祖有功。官至侍中。六代祖洙。禮曹判書。封海平君。祖諱璟。文科縣監。考諱應衮。不仕。
妣安康盧氏。士人弘道之女。公少師寒岡鄭先生。篤志力學。鄭先生甚重之。倭寇遍嶺南。公盡室奔湖南。當流離際。仍遭
二親憂。而行喪能以禮。人以爲難。湖南又被兵。遂入江都。中乙巳司馬。居江都十餘歲。始歸舊鄕。自是屢發解。或居首
選。名聲益振。光海時。星州士子。遭變禁錮。禍且及寒岡。公爲鄕人。草疏辨明。又嘗爲疏論仁弘罪惡當誅。語太勁。人
爲公危之。而公不少動也。今上卽阼。掌銓者聞公賢。屢擬官未除。會朝廷以星州士久錮可愍。特設恩科。公擢第一。賜直
赴殿試。遂登甲子文科。年已六十一矣。超授成均館典籍。累遷工曹禮曹佐郞。陞正郞。兼春秋館記注官。尋出爲務安縣監
。政淸如水。其治類元魯山陽道州。皆余所目擊也。比解歸。囊裝蕭然。至家則弊廬不芘風雨。親舊爲出力葺治之。累除禮
曹正郞,宗廟署令。皆不就。丙子二月四日。以疾卒。得年七十有三。以是歲五月某日。葬于某地某山午向之原。從先兆也。公爲人
恬靖寡慾。其廉白絶人。蓋天性然也。形貌甚癯。若不能勝其衣。而操履甚確。平居恂恂和易。口未嘗言人過。至當利害辨
是非。凜然有不可奪者。少嗜書。至老不廢呻佔。自號雲巖居士。嘗手植三松於庭。爲之贊以見意焉。旅軒張公顯光。以星
山志屬公。會疾作。文未成而沒。惜哉。公娶治城宋氏監察涉之女。生二男五女。男曰夏鼎,殷鼎。女長適主簿呂炯。次四壻。羅尙褧,都愼徽,黃䨵,李杜齊其人也。側室有子漢鼎。幼。銘曰。
浴之使白者。可黔而黑。澂之使淸者。可汩而濁。孰如金公。天然皎潔。知希益貴。我著其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