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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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고산서원(高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 34
   이상정(李象靖) 이광정(李光靖)
   1768년(영조 44)
   
   3월 초정(初丁)
   경상북도기념물 제56호(1985.10.05지정)
1768년(영조 44) 이상정(李象靖)이 고산정사를 창건하여 학문과 후진 양성을 한 터전에 선생이 돌아가신 후 1789년(정조 13)에 사림의 공의로 대산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여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후 이 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향사만 지내왔다. 1977년 고산정사와 백승각을 보수하고, 1984년과 1985년에 강당인 호인당, 묘우인 경행사, 동재를 중수하였다. 1985년 유림의 공의로 소산 이광정 선생을 배향하였다.

1)이상정(李象靖, 1711~178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아버지는 태화(泰和)이며, 어머니는 재령 이씨(載寧 李氏)로 현일(玄逸)의 손녀이며 재(栽)의 딸이다. 안동 일직현에서 출생하였다.
14세에 외할아버지 이재를 사사하였다. 학문에 크게 힘써 문장·율려(律呂) 등 제도문물에 대하여 연구하고 경학에 침잠하였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9년 연원 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1753년 연일현감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퇴도서절요 退陶書節要≫·≪심동정도 心動靜圖≫·≪이기휘편 理氣彙編≫·≪경재잠집설 敬齋箴集說≫ 등 사상적 기초를 정립한 여러 저술을 남겼다.
38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해 시묘하던 중 ≪사례상변통고 四禮常變通攷≫와 ≪약중편 約中編≫을 편찬하였다. 연일현감으로 있을 때는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였다. 2년 2개월만에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고신(告身 : 직첩의 별칭)을 박탈당하였다.
그 뒤로는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사우들과 강론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특히, 최흥원(崔興遠)과 친교를 맺고 아들 완(琬)을 그에게 배우게 하였다. 그는 사상을 정리하여 ≪심무출입설 心無出入說≫·≪주자어절요 朱子語節要≫·≪밀암선생연보 密庵先生年譜≫·≪심경강록간보 心經講錄刊補≫·≪연평답문속록 延平答問續錄≫ 등을 저술, 편찬하였다.
그는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하던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 이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외할아버지를 통해 영남 이학파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그 근원이 되는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황의 존리적(尊理的)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성학집요 讀聖學輯要≫ 등의 저술을 통해 기호학파의 이기를 대등하게 보는 태도를 거부하였다.
다만, 이황의 존리적인 태도를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여 일방적인 주리론을 펴는 것을 반대, 이(理)의 동정(動靜)과 이기(理氣)의 선후(先後) 등이 가지는 의미를 해명하고 본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명이기(性命理氣)에 대한 논의보다는 덕성을 배양하는 일용궁행(日用躬行)의 실천적 공부에 치중해야 함을 강조, 일용평상(日用平常)의 도리인 유학의 본지로 돌아가는 일을 몸소 실천하였다. 또 유범휴(柳範休)에게 16자 지결(旨訣)을 써주어서 그의 학통을 전한 것으로 이해 되었다.
그의 학문적 흐름은 아우인 광정(光靖)과 남한조(南漢朝) 유범휴(柳範休)를 통해 유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러 유리론(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한말에 이르러서는 곽종석(郭鍾錫)으로 계승되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 참지·예조 참의 등에 발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종 때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봉안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2)이광정(李光靖, 1714~1789)
자는 휴문(休文)이고, 호는 소산(小山)으로 대산 이상정의 아우로 태어나 종숙 지화공에게 출계했다. 15세 때부터 외조 밀암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735년(영조 11)에 증광향시, 16년에 동당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전시에 불리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영조 29년 어사가 영남인재 세 사람을 추천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으로 뽑혔고, 1783년(정조 7) 국왕이 ‘이상정의 아우 광정이 학문과 행검으로 도내에 알려져 그 형의 풍도를 지녔다 하니, 가상한 일이다’고 하여 이조에 명해 기용토록 분부했다. 온릉참봉, 동문교관, 사과, 별제등 직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했다. 비범한 재질로 평생 학문과 행검에 힘을 쏟았다. 문집 13권 7 책이 있으며, 1985년에 유림의 발의로 고산서원에 배향하여 봉안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경행사(景行祠), 신문, 호인당(好仁堂), 전사청, 서재인 백승각(百乘閣), 동재인 청임헌(淸臨軒)·앙지재(仰止齋), 고산정사(高山精舍), 외삼문인 향도문(嚮道門), 주사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상향축문(常享祝文)은 참봉, 수정재(壽靜齋) 유정문(柳鼎文)이 지었다.
 
1)사우
사우인 경행사(景行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을 사용하였으며 겹처마로 단청이 되어 있다. 내부에는 대산 이선생의 위패가 왼쪽에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 소산 이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동, 서쪽에 3단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사당 뜰에는 정요대가 2기 설치되어 있다. 이 정요대는 일명 불받침대라고도 하며 서원에 행사가 있을 때 관솔불을 지펴 그 위에 올려 놓아 주위를 밝힐 때 사용하였다.
 
2)강당
서원 강당인 호인당(好仁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써 10칸 집으로 구성되었고, 동쪽에 명성재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 2칸짜리 방이 하나 있고 나머지 8칸은 마루이다. 이곳은 서원내의 행사 때 유림의 공론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3)기타
전사청은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다. 동재는 향사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서재인 백승각(百乘閣)에는 서원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특히 동재와 서재의 앞쪽에는 개방된 마루를 두어 주변 경관을 음미하도록 꾸며져 있다. 향도문(嚮道門)은 향사 때만 개문하여 집사들의 출입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4)고산정사(高山精舍)
서원의 일곽 좌측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고산정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정자건물로 따로 담장이 구획되어 있어 서원에서는 바로 진입이 되지 않는다. 좌우에 방을 배치하고 가운데는 한칸 크기의 마루를 깔아 좌우대칭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팔작기와집으로 정면에 출입을 위한 일각문이 작게 서 있다. 풍광이 수려한 전망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