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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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명호서원(明湖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 옹정골길 38
   이 원(李 原) 이 주(李 冑)
   1790년(정조 14) ❏향 사 일: 9월 중정(中丁)
   
   9월 중정(中丁)
   어은정및재사(漁隱亭및齋舍)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42호(1973.08.31지정)
명호서원은 1790년(정조 14)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원과 이주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의 자미산 아래에 있었고 서원명도 명계서원이라 불렀다. 그 후 1837년(헌종 3)에 정상동으로 이전하여 명호서원이라 개 칭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으나, 매년 9월 중정에 설단으로 향사를 올리고 있다.

1)이원(李原, 1368~143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 우(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암(嵒)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 강(岡)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82년(우왕 8) 진사가 되고, 1385년 문과에 급제, 사복시승(司僕寺丞)을 거쳐 예조좌랑과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지평이 되었고, 1400년(정종 2) 좌승지 때 방원(芳遠)이 그의 동복형인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그 해 철성군(鐵城君)에 봉작되었고, 같은 해 공안부소윤(恭安府少尹)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순군(巡軍) 윤종(尹琮)을 구타한 죄로 한 때 파직되었다. 이듬 해 복직되어 경기좌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左右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고, 1403년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으로 있으면서 고명부사(誥命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평양부윤으로 있으면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겸하고, 1406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와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직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판한성부윤을 거쳐, 1408년 태조가 죽자 국장을 주관하는 빈전도감판사(殯殿都監判事)가 되었고, 이듬 해 경상도관찰사로 영상주목사를 겸직하였다. 이 해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1414년 영길도도순문사(永吉道都巡問使)를 거쳐, 이듬 해 6월 예조판서로 있다가 12월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참찬을 거쳐 1416년 3월 판한성부사, 5월 병조판서, 1417년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와 찬성을 거쳐 이듬 해 우의정에 올랐다. 1419년(세종 1)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했고, 1421년 1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1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우의정 정탁(鄭擢)과 함께 도성수축도감도제조가 되어 8도의 정부(丁夫) 32만 5000여 명을 징발, 1422년 1월부터 두 달에 걸쳐 토성이던 도성 성곽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1425년 등극사(登極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功臣錄券 : 공신에게 주는 공훈사령장)을 박탈당하고 여산(礪山)에 안치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세조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고려 말기부터 문명이 알려져 조선 초기에 국기를 다지고 제도를 확립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중신이다. 그러나 말년에 부귀가 모이자 지나친 위세를 부려 사람들의 지탄을 받아, 급기야 공신녹권까지 박탈당하고 고독한 귀양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용헌집≫·≪철성연방집 鐵城聯芳集≫이 있다. 시호는 양헌(襄憲)이다.
 
2)이주(李冑, 1468~150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주지(胄之), 호는 망헌(忘軒). 좌의정 원(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증(增)이고, 아버지는 현감 평(評)이며, 어머니는 허추(許樞)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8년(성종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正言)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갔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전에 궐내에 대간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성품이 어질며 글을 잘하였고, 시에는 성당의 품격이 있었으며,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직언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주로 삼사(三司)에서 활약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원(忠元)이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인 경의사를 비롯하여 명륜당, 동재, 서재, 신문, 전사청, 주소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어은정사 및 재사와 고직사만 남아있으며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에는 사주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동재가 있고, 정면으로 강당, 좌측에 고직사가 위치하고 있다. 단소는 서원 영역의 좌측 후면에 따로 자리를 잡고 배치되어 있다.
 
1)어은정사 및 재사-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42호(1973.08.31지정)
이 건물은 이황(李滉)의 문하로서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지낸 이용(李容)이 1570년(선조 3)에 창건한 것이다. 어은정은 정자(亭子)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고, 이와 같이 있는 재사(齋舍)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또 부속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이들 건물은 안동댐 수몰로 1974년 12월 와룡면(臥龍面) 도곡동(道谷洞)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 경북서원지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안동관광정보센터 http://www.tourandong.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