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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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봉암서원(鳳巖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매곡리
   남응원(南應元) 남융달(南隆達) 남 급(南 礏) 남천한(南天漢)
   1802(순조 2)
   
   3월, 9월 초정(初丁)
   
1)남응원(南應元 ,1539-1611)
본관은 영양으로 자는 인중(仁仲)이며 호는 허영정(許潁亭)이다. 선생은 효성이 극진하여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6년 동안이나 시묘를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1580년(선조 13)에 여강서원등 고장 사림의 천장으로 감사 유홍, 정지연 등이 차례로 공의 효성과 행검을 조정에 알려 임금이 포상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575년(숙종 원년)에 정려가 내리고, 숙종 5년 통훈대부사복시정에 증직되었으며 영조 18년 사림에서 봉암사에 제향하였다.
 
2)남융달(南隆達, 1565~1652)
본관은 영양으로 자는 현언(顯彦)이며 호는 나재(懶齋)로 남응원의 아들이다. 공은 일찍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실패하여 한창 나이에 과거공부를 버리고 자질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영양남씨 족보를 처음 편찬하였다. 부모 상사에 3년을 여묘했으며 노인 우대의 특전으로 통정대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 호군에 임명되었다.
3)남급(南礏, 1592~167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탁부(卓夫), 호는 유유헌(由由軒). 아버지는 융달(隆達)이다. 1624년(인조 2)에 사마시에 합격, 1630년에 음보(蔭補)로 기용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사옹원 봉사로서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으며, 당시 성 안에서 있었던 일을 ≪난리일기 亂離日記≫로 써서 남겼다. 환도한 뒤 종묘시 직장으로 옮겨 위패를 고쳐 봉안하였다.
그뒤 조정에서 왕을 호종한 사람을 위하여 과거를 보게 하였으나 치르지 않았고, 또 별제를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잠농요어 蠶農要語≫를 지었다. 참판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유유헌유고 由由軒遺稿≫가 전한다.
4)남천한(南天漢, 1607~168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장우(章宇), 호는 고암(孤巖). 아버지는 잡(碟)이며, 어머니는 권종선(권종선)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164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지평·장령 등을 거쳐 1675년(숙종 1) 집의·대사간으로 승진하고 이듬해부터 여러 차례 승지를 역임한 뒤 1680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예론에 밝아, 민신(閔愼)이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의 복을 입으려는 것을 논란 끝에 막은 일이 있다.
또, 예송(禮訟)에 깊이 참여하여 남인의 입장을 앞장서 천명하였다. 특히,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장령으로 재직하면서 가장 먼저 송시열(宋時烈) 유배와 송준길(宋浚吉)의 관작추탈을 주장하였다. 그뒤 숙종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호조참의 재직중 벼슬을 박탈당하였다.
 

1)남응원(南應元 ,1539-1611)
본관은 영양으로 자는 인중(仁仲)이며 호는 허영정(許潁亭)이다. 선생은 효성이 극진하여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6년 동안이나 시묘를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1580년(선조 13)에 여강서원등 고장 사림의 천장으로 감사 유홍, 정지연 등이 차례로 공의 효성과 행검을 조정에 알려 임금이 포상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575년(숙종 원년)에 정려가 내리고, 숙종 5년 통훈대부사복시정에 증직되었으며 영조 18년 사림에서 봉암사에 제향하였다.
 
2)남융달(南隆達, 1565~1652)
본관은 영양으로 자는 현언(顯彦)이며 호는 나재(懶齋)로 남응원의 아들이다. 공은 일찍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실패하여 한창 나이에 과거공부를 버리고 자질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영양남씨 족보를 처음 편찬하였다. 부모 상사에 3년을 여묘했으며 노인 우대의 특전으로 통정대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 호군에 임명되었다.
3)남급(南礏, 1592~167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탁부(卓夫), 호는 유유헌(由由軒). 아버지는 융달(隆達)이다. 1624년(인조 2)에 사마시에 합격, 1630년에 음보(蔭補)로 기용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사옹원 봉사로서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으며, 당시 성 안에서 있었던 일을 ≪난리일기 亂離日記≫로 써서 남겼다. 환도한 뒤 종묘시 직장으로 옮겨 위패를 고쳐 봉안하였다.
그뒤 조정에서 왕을 호종한 사람을 위하여 과거를 보게 하였으나 치르지 않았고, 또 별제를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잠농요어 蠶農要語≫를 지었다. 참판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유유헌유고 由由軒遺稿≫가 전한다.
4)남천한(南天漢, 1607~168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장우(章宇), 호는 고암(孤巖). 아버지는 잡(碟)이며, 어머니는 권종선(권종선)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164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지평·장령 등을 거쳐 1675년(숙종 1) 집의·대사간으로 승진하고 이듬해부터 여러 차례 승지를 역임한 뒤 1680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예론에 밝아, 민신(閔愼)이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의 복을 입으려는 것을 논란 끝에 막은 일이 있다.
또, 예송(禮訟)에 깊이 참여하여 남인의 입장을 앞장서 천명하였다. 특히,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장령으로 재직하면서 가장 먼저 송시열(宋時烈) 유배와 송준길(宋浚吉)의 관작추탈을 주장하였다. 그뒤 숙종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호조참의 재직중 벼슬을 박탈당하였다.
 

서원의 건물 구성은 묘우인 상현사(尙德祠), 강당인 현휘당(賢輝堂), 숭덕재, 광업재, 전사청, 고직사로 이루어져 있다. 묘우인 상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전면 중앙에 주향인 허영정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좌측에 유유헌 선생, 우측에 난재, 고암 선생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강당인 현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인 숭덕재와 서재인 광업재는 전면 3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유생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전사청은 정면 2칸, 측면 1칸이며 주소는 구자형 와가로 이루어져 있다.

봉암서원에 소장되어 있던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