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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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창렬서원(彰烈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교리 267
   하위지(河緯地)
   1804년(순조 4)
   
   9월 2일
   
사육신 중의 한사람인 하위지(河緯地)의 학문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1804년(순조 4)에 창열사(彰烈祠)를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1809년(순조 9)에 송야리에 창렬서원을 창건하였다.
그 뒤 사림의 중의(衆議)로 안동시 서후면 이계로 이건하였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 서원 훼철(毁撤)에 의해 철폐(撤廢)되었던 것을 1989년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현 위치에 복설되어 매년 9월 2일에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1)하위지(河緯地, 1412~1456)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적촌(赤村). 선산 출신. 윤(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지백(之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담(澹)이며,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경상감사에게도 그를 구료하도록 전지(傳旨)를 내렸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가 되어 ≪오례의주 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무함을 당해 전라감옥에 갇혀 병이 깊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을 간호하였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해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鄭而漢)과 정창손(鄭昌孫)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다. 그 해 ≪역대병요 歷代兵要≫와 병서(兵書)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학사의 품계를 수양대군 (首陽大君)이 앞장서서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상도 영산(靈山)의 온정(溫井)으로 내려갔다. 1454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佛堂)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에서 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 해 집현전부제학에서 예조참의로 전임되었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선산에 퇴거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그를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곧 이어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 후 그에게 교서를 내리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다.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 왕권강화책의 하나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署事制)를 폐지시키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대해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예(司藝)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국문(鞫問)을 받게 되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刑 :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을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 작은아들 박도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해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 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 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는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경내의 건물은 3칸의 창렬사(彰烈祠), 4칸의 숭렬당(崇烈堂), 3칸의 성인재(成人齋), 2칸의 전사청(典祀廳), 3칸의 신문(神門), 3칸의 유의문(由義門) 등이 있다.
경사지에 산을 일부 깎아 건물들을 지형에 맞춰 건물들을 앉힘으로서 강당과 사당만 좌향을 하고 있고, 다른 건물들은 각기 다른 향을 바라보고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