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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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호계서원(虎溪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84-3
   이 황(李滉)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1575년(선조 8)
   1676년(숙종 2)
   불향
   숭교당(崇敎堂)-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5호(1973.8.31지정)
퇴계(退溪)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5년이 지난 1575년(선조 8) 안동지역 사림들이 힘을 모아 퇴계선생이 젊었을 때 독서하였던 곳인 안동부 동북쪽 월곡 여산촌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건립하고, 1576년 문순공(文純公) 퇴도이선생(退陶李先生)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퇴계선생을 봉향한 서원이라는 점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으며, 서원의 규모도 영남지역에서 가장 큰 대표서원이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사당인 존도사(尊道祠)가 6칸, 신문(神門) 3칸, 신주(神廚) 5칸, 강당인 숭교당(崇敎堂)이 15칸, 동재인 구인재(求仁齋) 4칸, 서재인 명의재(明義齋) 4칸, 진학문(進學門) 1칸, 동몽재(童蒙齋) 15칸, 유사방(有司房) 5칸, 재주(齋廚) 15칸, 보상고(寶上庫) 15칸 등 92칸이나 되었다. 또 동협실을 사성재(思誠齋), 서협실을 주경재(主敬齋)라 하였다. 그러나 여강서원은 1605년 대홍수로 유실되었고, 1606년 북쪽으로 100보 위치에 중창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퇴계 문하의 고제(高弟)로서 영남 사림의 존경을 받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양 선생을 추향(配享)하고, 조선성리학의 본거지인 안동의 수선서원(首善書院)이 되었다. 영남 사림의 큰 행사는 여강(호계)서원의 통문(通文)으로 결정되는 최고권위의 서원이었다. 두 선생의 위패를 주향서원인 임천서원(臨川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에서 각각 모셔와 여강서원에 봉안(移安)할 때, 임천서원 소유의 서책(書冊)과 전답(田畓), 노비(奴婢)를 모두 여강으로 옮겼다. 추향시 두 선생 위패의 위차(位次)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으며, 배향 당시 영남 사림의 장로였으며 서애선생의 제자였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의 주장에 따라 좌서애ㆍ우학봉으로 모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애학파는 1629년 호계서원과는 별도로 병산서원에 서애선생의 위패를 새로 봉안하였다. 이후부터 호계서원은 학봉학파의 영향력이 커졌다.
1676년 호계서원(虎溪書院)이라 사액(賜額)되었다.
1805년 영남 4현(四賢) 즉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한강(寒岡) 정구(鄭 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4선생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청하는 상소를 호계서원에서 주도하였는데, 서애ㆍ학봉 두선생 중 어느 분을 앞에 모시는가를 두고 양측이 대립하여 결국 4현의 문묘배향 자체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양측의 갈등을 병호시비(屛虎是非)라 하였다. 병(屛)은 서애학파의 주활동 무대였던 병산서원(屛山書院)을 가리키며 병론(屛論)라고도 했다. 호(虎)는 당시 학봉학파가 중심이었던 호계서원(虎溪書院)을 가리키며 호론(虎論)이라고도 했다.
1812년 호계서원에 퇴계ㆍ학봉학파의 적통(嫡統)을 이은 대표적인 학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선생 추배를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서애학파(병론)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1868년 대원군 당시 서원훼철 대상에 처음에는 빠져있었으나, 곡절 끝에 1871년 훼철되고 말았다. 훼철에 반대하여 서원훼철반대 유소(儒疏)를 추진하면서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과 함께 호계서원 유생들이 주도하였다.

1)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 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 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27세(1527)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 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 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선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김성일(金誠一, 1538~159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안동 임하현 천전리에서 진(璡)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서경≫, ≪역학계몽(易學啓蒙)≫, ≪심경≫, ≪대학의의(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다시 도산(陶山)에 돌아와 수학하였다. 퇴계로부터 “행실이 고상하고 학문이 정수하여 내가 본 중에 그와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평을 들었으며, 요순(堯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 80자를 손수 쓴 병명(屛銘)을 받았다. 그 마지막에 “박문약례(博聞約禮) 두 가지를 모두 지극하게 하였으니 도통연원의 바른 맥을 이었도다(淵源正脈).”라고 주자를 칭송하는 말로 끝맺고 있다. 이 병명을 두고 후학들은 도통(道統) 전수(傳授)의 징표로 이해했다.
156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1572년에는 「노릉복위 육신복작 종친서용소(魯陵復位 六臣復爵 宗親敍用疏)」를 올려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 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했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후일 종계를 바로 잡은 것은 이때의 성과였다. 사헌부장령이 되어서 왕의 면전에서 과감하게 간하며 고관들의 잘못을 피하지 않고 지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전상호(殿上虎)라 불렀다.
1579년 및 이듬해에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使)로 함흥ㆍ삼수ㆍ길주ㆍ종성ㆍ온성ㆍ경원 등 함경도 각지의 성지와 군기를 검열하고 창고의 곡식을 조사하는 등 국방실태를 점검 하였다. 군사들에게 옷을 나누어 주며 위무하였고, 백성들의 폐막을 포함한 변경의 문제점을 상소 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 순무어사가 되어서는 족징⦁인징 등의 군역 상의 문제점, 무비 해이의 폐단, 방납의 문제점 등 일곱 가지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그 해결책을 건의하였다. 특히 공납제에 대하여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방납에 따른 폐단을 시정할 것과 아울러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할 것을 주청하였다.
같은 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3년여 동안 재직하면서 목민의 이상 실천에 힘썼으며 오랫동안 끌어온 송사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나주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 : 지금의 경현서원)을 세워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 등 동방오현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케 하였다. 나주에 목사로 있으면서 ≪성학십도(聖學十圖)≫, ≪계산잡영(溪山雜詠)≫,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퇴계선생자성록(退溪先生自省錄)≫ 등 퇴계선생의 주요 저작을 간행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어서는 왜인의 서계(書契 :조선과 일본 사이에 주고받던 외교문서)의 패만한 내용을 고치도록 목숨을 걸고 주창하여 일부 반영시켰으며, 외교상의 의전, 격식, 절차에 나라의 명예와 체통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조선국연혁고이>와 <조선국풍속고이>를 지어서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주체성(主體性)을 선양하였다.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정세를 보고할 때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전쟁 발발의 소문으로 온 나라의 흉흉해진 민심을 진정시키고자 “일본이 반드시 침입할 정황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나, 나중에 왕과 비변사 등 소수의 국방 최고책임자들에게는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말한 일본 사신의 말을 보고하여 국방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 해 홍문관 부제학이 되어서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여 민심을 얻을 것과, 왕자들의 호화주택과 부정축재, 군정의 문란, 동서붕당과 관료들의 악습, 한 겨울의 축성 등의 여러 가지 문제의 시정을 주창하면서 국방력을 제대로 강화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이 신원되도록 힘썼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 중에는 진입하는 왜군의 선발대를 물리쳐서 임진왜란 최초로 승전을 이루었다. 그때 국왕 선조는 그의 전년도의 귀국보고를 문제 삼아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승전에 관한 장계와 왕세자, 유성룡(柳成龍), 최황(崔滉) 등의 변호로 초유사로 임명되어 경상도로 되돌아가서 의병 창기와 왜군 격퇴에 신명을 바쳤다.
초유사로서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의 의병 창기와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과 감사, 수령 간의 불화를 잘 조정하여 의병의 희생이 적도록 하면서 왜적에게 실함된 여러 고을을 수복하고 내지로의 적의 침입을 막았다.
경상우도 감사로서는 진주의 군사적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 병력의 확보, 성지의 수축, 병기의 준비, 군량의 확보 등 왜적의 침입에 사전에 대비하게 하였다. 왜적이 진주성을 포위하기 전에 김시민(金時敏), 이광악(李光岳) 등의 관군은 진주성 내에, 곽재우, 윤탁(尹鐸), 정언충(鄭彦忠), 김준민(金俊民), 최경회(崔慶會), 조응도(趙凝道), 정유경(鄭惟敬) 등의 의병들은 성 밖 동서남북 사방에 미리 배치하였으며, 왜적이 쳐들어오자 성 내외에서 합동하여 대처케 함으로써 진주대첩을 거두게 하였다. 이 진주대첩으로 호남을 방어하게 됨으로써 국가 중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1593년 기민 구휼과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던 중 진주 공관에서 순국하였다.
학문적으로 그는 이황의 적전고제(嫡傳高弟)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해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다. 그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류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으로 전해져, 한말 의병 창기와 안동 독립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家禮)≫에 따라 행했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 ≪구씨의절(丘氏儀節)≫, ≪향교예집(鄕校禮輯)≫등을 참고해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었다.
1664년(현종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임천서원(臨川書院),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海槎錄)≫, ≪상례고증≫등이 있으며, <경연일기>, <조천일기>, <북정일기> 등이 전한다.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 : 道德博聞曰文 危身奉上曰忠)이다.
 
3)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출생. 자온(子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 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 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 (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해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지어 올렸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그 해 함경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했으며, 15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다음 해 ≪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 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했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 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내도록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 사신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 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해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 西厓集≫·≪징비록 懲毖錄≫·≪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운암잡기 雲巖雜記≫·≪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 등이 있다.
편서로는 ≪대학연의초 大學衍義抄≫·≪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 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해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 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모두 90여칸으로 안동에서 가장 큰규모의 서원이었으나, 지금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강당과 10여칸 규모의 고직사만이 보존되고 있다. 병호시비(屛虎是非)의 진원이기도 한 이 서원은 풍광도 명미한 월곡면 도곡동 낙동강 굽이에 안겨 있었는데, 안동호에 자리를 내주고 지금은 임하면 임하동에 옮겨져 있다.
강당인 숭교당(崇敎堂)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평면상으로는 一자집인데, 지붕의 양쪽 끝이 정면을 보고 있는 ㄷ자형의 매우 특이한 형태이다.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은 방이다. 해마다 1번씩의 당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