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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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운산서원(雲山書院)
   경북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 944
   백문보, 백현룡
   1899년(광무 3)
   
   
   운산서원 강당 문화재자료 제485호, 2005.06.20 지정
운산서원강당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899년(광무 3)에 백순지 등이 재건한 것이다. 
훼철되기 이전 운산서원은 3칸의 경덕묘(景德廟), 3칸의 입도문(入道門), 동재(東齋)에 해당하는 3칸의 직방재(直方齋), 서재(西齋)에 해당하는 박약재(博約齋), 그리고 8칸의 강당 등 총 41칸 규모의 아주 큰 서원이었다. 현재는 교육 시설인 강당과 좌우에 온돌방만 있고 제사 시설인 사당은 남아 있지 않다.

1) 백문보(白文寶, 1322년∼1374년)
백문보는 고려 말의 명신으로, 자는 화보(和父)이고 호는 담암(淡庵)이다. 사후에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백문보는 어려서부터 총명한데다 학문에 힘써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우상시(右常侍) 등 문필과 관련된 관직과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는 인재를 뽑아 쓰는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다. 그런데 고려왕조는 4백여 년 동안 인재 등용에 있어 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더욱이 무신 집권 이후 인재 등용 제도가 무너졌으며, 몽고의 내정 간섭으로 인재 등용의 길이 더욱 문란해졌다. 이때 백문보는 유능한 인재를 올바르게 등용하여 조정을 바로잡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졌다. 그래서 그는 공민왕에게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인재 등용의 난맥을 논하고 과거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안은, 과거를 십과(十科)로 분리해 실시하여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관원을 뽑고, 또한 왕의 측근에서 중요 정책의 결정에 참여하는 밀직사(密直司) 제학(提學) 등의 요직은 반드시 과거를 통해 뽑은 인재를 기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 모두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전리판서로 있는 동안 고려 조정의 인사는 상당히 혁신될 수 있었다. 
백문보는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피난길에 나섰다. 이 난리로 개경에 있던 사초(史草)와 실록(實錄)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이때 왕은 청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공봉(供奉) 곽추(郭樞)에게 명하여 나머지 서책도 모두 경상도 해인사에 옮기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백문보는 국가의 중요 문건을 수도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옮기면 백성들이 난리가 잘 수습되지 않는 줄 알고 불안해할 것이라고 민심이 흉흉해질 것이므로 이를 중지해야 한다고 공민왕에게 건의하여 중지케 하였다. 
또한 백문보는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진정한 유학자였다. 그래서 그는 고려 말의 안향(安珦), 백이정(白頤正) 등과 같이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 정치를 주장하면서, 문란해진 승려들의 생활과 정치 간여를 비판하고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공민왕은 그의 인품을 믿어 요직에 배치하였으나, 불교에 대한 정책과 승려의 대우 문제에 있어서는 그와 의견이 달랐었기에, 차츰 그 사이가 멀어져갔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올바른 논리와 명분으로 불교 폐단을 지적하고 승려 허가제와 같은 혁신적인 정책을 건의하였다. 
백문보는 그 인품이 공명정대하고 임금에대한 충성심도 남다는 충신이었기 때문에, 공민왕은 그와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그에게 정사를 맡겼다. 그래서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돌아온 뒤 전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환안도감(還安都監)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였을 때, 공민왕은 그 중책을 백문보에게 맡겼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전쟁으로 소실된 전적들을 복구하면서 불교식으로 된 의식과 제도를 유교식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처럼 그는 과감한 개혁을 통해 고려를 새롭게 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2) 백현룡(白見龍, 1543년∼1622년)
백현룡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대흥(大興)이며 자는 문서(文瑞) 호는 성헌(惺軒)이다. 진사를 지낸 백미량(白眉良)의 아들이다. 1609년(광해 1)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했다. 
백현룡은 일찍이 퇴계 이황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그는 해마다 도산서원의 농운정사(隴雲精舍)와 청량산사(淸凉山寺)에 와서 묵으면서 『대학(大學)』,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을 읽으며 퇴계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백현룡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어하는데 힘을 합쳤다. 1609년(광해 1)에 식년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에 올랐으나, 더 이상 과거와 벼슬에 대한 뜻을 갖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자연을 벗하여 오직 학문에만 마음을 기울였다.

운산서원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평면은 어간(御間)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中堂挾室型)의 일자형(一字形) 건물이다. 대청의 전면에는 4짝의 분합(分閤) 들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고 그 앞에는 헌함(軒檻)을 설치하였다.


참고자료 : 수산
 
율정설(栗亭說)
<담암 백문보>
윤상군초복택어곤강지양 택동서율림조밀 인구옥왈율정 금우소서이신구택 율림유번언
( 尹相君初卜宅於坤岡之陽宅東西栗林稠密因構屋曰栗亭今又少西而新購宅栗林愈蕃焉)
상국 윤택(尹澤)군이 처음 곤강 남녘 둔턱에 집터를 마련하였다. 집 주변에 밤나무가 주밀하여 거기에다가 가옥을 짓고 이름을 율정이라 하였다. 지금은 또 조금 서편에 새로이 집을 샀는데 밤나무 숲이 더욱 무성하였다.
 
성거한식율 윤공구택즉유율시취 상위여왈 춘즉지소 상영어화훼 하즉엽밀 가게호기음
(城居罕植栗尹公購宅卽惟栗是取嘗謂予曰春卽枝疎相映於花卉 夏卽葉密可憩乎其陰)
성안에 있는 주택에서는 밤나무를 심는 사람이 적은데 윤공은 집터를 구할 때마다 오직 밤나무 있는 곳을 선택하였으니 일찌기 나에게 말하기를 "봄에는 가지가 성성하여 가지 사이로 꽃이 서로 비치고 여름에는 잎이 우거져 그늘에서 놀 수가 있으며
 
*추즉실미 족충어오구 동즉방추 통소호오돌 오시용취율언 여왈화취조수유습동기상구
(秋卽實美足充於吾口冬卽房墜通燒乎吾돌 吾是用取栗焉余曰火就燥水流濕同氣相求)
가을에는 밤이 맛이 들어 내가 맛있게 먹을 수 있고 겨울에는 밤송이를 모아 아궁이에 불을 뗀다네. 나는 이러해서 밤나무를 좋아하지"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불은 마른 것에 잘 붙고 물은 습기가 축축한 곳으로 잘 흐르는 것은 성격이 비슷한 것 끼리 서로 찾아가는 것이니 * 돌(土+突:아궁이 돌)
 
이고필연 개기소상즉물아지무문 유부득불연자하야 천지지간 초목지생 균시일기
(理固必然蓋其所尙卽物我之無問有不得不然者何也天地之間草木之生均是一氣)
이치에 있어 반드시 그러한 것이네". 대저 그 숭상하는 바가 같으면 물건이나 내가 다른 것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해서 그러하냐 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 풀과 나무가 생기는 것이 모두 한 기운으로 되는 것이다.
 
연기근묘화실 유난이선후지불일 독시율최후어만물지생 재심난장 이장즉이장엽심지발
(葉其根苗花實有難易先後之不一獨是栗最後於萬物之生栽甚難長而長卽易壯甚遲發)
그러나 그 뿌리, 싹, 꽃, 열매가 어려운 것, 쉬운 것, 일찍 되는 것, 늦게 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다만 이 밤은 모든 식물보다 가장 늦게 나는 것이며 그것을 심지만 키우기는 어려운데 그러나 자라기만 하면 쉽게 왕성하게 자라고 잎은 매우 늦게 피지만
이발즉이음 화심만개 이개즉이성 실심후결 이결즉이수 개기위물이유휴영 겸익지리의
(而發卽易蔭花甚晩開而開卽易盛實甚後結而結卽易收蓋其爲物而有虧盈謙益之理矣)
피기만 하면 곧 그늘을 쉽게 만든다. 꽃이 매우 늦게 피지만 피기만 하면 곧 왕성하며 열매가매우 늦게 열리지만 맺기만 하면 곧 쉽게 수확할 수 있다. 대저 그것은 식물로서 부족함과 과잉, 결점과 유리한 점의 이치가 있는 것이다.
윤공여여동년등과 년이삼십유여 이유사십 시점일명 인개이위만 이공취사우근
(尹公與予同年登科年已三十有餘而踰四十始霑一命人皆以爲晩而公就仕尤謹)
윤공은 나와 같은 해에 급제하였는데 그 때의 나이가 30여 세였다. 그러다가 사십 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감으로 사람들은 모두 늦었다고 하였으나 공은 직무에 더욱 근신하며 충실히 하였다.
급지우어선군지대용 일일구천 등현위작사명 부대교유이울호기달의 기소립자선난
(及知遇於先君之大用一日九遷登顯位作司命不待矯유而蔚乎其達矣其所立者先難)
그러다가 임금께서 공을 먼저 알아보시고 크게 등용함의 은덕을 입었는데 하루 동안에 아홉 번을 승진하여 대신의 지위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별로 손질을 아니하였는데도 울창하게 자라 뻗은 나무와 같다. 그 입신 하는 바가 처음은 어려웠지만 * 유(手+柔:부빌유. 바로잡을 유. 순할 유) 
이기소취자후이 개유동어시율지화실 여청이리유 부초목지구토 기맹심이탁지탁즉아아이지
(而其所就者後易蓋有同於是栗之花實余請以理喩夫草木之句土其萌深而坼遲坼卽芽芽而枝)
그 성취하는 바가 나중에는 쉽게 된 것이니 대저 이 밤나무의 꽃과 열매와 같음이 있다. 나는 이치로 설명하려고 한다. 무릇 식물의 뿌리가 흙에 묻혀있을 때 그 싹이 깊으면 터져 올라옴이 늦다. 터져 올라오면 곧 눈이 트고 눈이 트면 곧 가지가 생겨
필성호간의 수천지영과 기출점이기류지 지즉애애이연 필달호해의 고기지필장이속야
(必成乎幹矣水泉之盈科其出漸而其流止止卽匯匯而淵必達乎海矣故其遲必將以速也)
반드시 줄기를 이룬다. 샘물이 웅덩이에 차 있으면 그것이 조금씩 흘러나오다가 그 흐름이 멈추면 물이 고이고 고인 물은 못이 되고 반드시 바다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연고로 그 더딤은 장차 빨리 되려는 것이다.
기지필장의속야 즉휴가이영겸가이익자 역하이재 가격기일물이질언 역족이관인지소상
(其止必將以達也卽虧可以盈謙可以益者亦何異哉可格其一物而質焉亦足以觀人之所尙)
그 중지함은 장차 끝까지 도달하려는 것이다. 즉 부족함은 과함이며 결점은 유리하게 됨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 가지 물건에 대하여 이것을 가히 실증할 수 있는 것이다. 역시나 사람이 숭상하는 바를 관찰하게 되는 것이니
 
즉화조수습 물아지무간자 부득불연의 연즉공지영달즉율지생장 이율지수장즉공지권서
(卽火燥水濕物我之無間者不得不然矣然卽公之榮達卽栗之生長而栗之收藏卽公之卷舒)
곧 불은 건조하고 물은 습하니 물건이나 나와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다.
그런즉 공이 출세하여 영화로운 것은 밤의 생장과 같은 것이며 밤을 수확하여 갈무리함은 공이 은퇴함과 같은 것이다.
기장야유보세지도언 기장야유양생지용언 여어시정 고표기리이위지설
(其長也有輔世之道焉其藏也有養生之用焉余於是亭故表其理而爲之說)
그 생장함에는 세상을 유익하게 함이 있고 그 갈무리함에는 자신의 건강을 보호하는 작용이 있다. 나는 이 정자에 대하여 이런 연고로 그 이치를 들어 설을 지어 나타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