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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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사계서원(泗溪書院)
   영주시 영주동(사계,서천교부근)
   황효공, 나이준
    1654년
   1780년
   
   
효종 5년(1654) 사림에서 사계서당(泗溪書堂)을 망궐리 사계에 창건 숙종 29년(1703) 사당을 세우고 황효공 나이준의 위패를 봉안하고 사계서원(泗溪書院)이라 하고 정조 4년(1780)에 사계서원으로 승격 하였다. 지금은 없어 지고 터도 모르고 현판만 안정면 용산리 황씨 문중이 관리를 한다. 사계서당기문(泗溪書堂記文)은 학사(學沙) 김응조(金應祖)가 짓고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은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이 짓고 흥교당중수기(興敎堂重修記)는 황용한(黃龍漢)이 지었다. ※ 휴천동 남간재에 있는 배유장(裵幼章)이 지은 남간서당이건기(南澗書堂移建記)에 의하면 사계서당(泗溪書堂)이 망궐리 사계에 있다가 광승촌에 이건을 하고 남간이란 연못이 있어서 남간서당(南澗書堂)이라고 하였다. 사계서당이 건립되고 시간이 지난 뒤 형편상 불편한 점이 있어 1685년(숙종 11) 봄 수임 송시의(宋時毅)가 여러 선비들과 상의하여 광승(廣升)마을에 터를 잡아 이건하였다. 서당의 크기가 협소하다고 판단하여 중간에 2칸을 늘렸으며, 시야를 트이게 하기 위해 동쪽에 있는 방 하나를 헐고 주사나 곳간도 모두 동시에 세웠다. 서당 아래에 남간이라는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남간서당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 황효공(黃孝恭)
1496(연산군 2)∼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보(敬甫), 호는 구암(龜巖). 영천출생. 아버지는 군자판관(軍資判官) 진(璡)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현감 평(泙)의 딸이다.
1521년(중종 16)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22년 승문원부정자가 된 뒤 1525년 성균전적, 1526년 형조좌랑을 거쳐 형조정랑·황해도사·교리·지평 등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532년 금산군수, 1534년 한성부서윤·종부시첨정을 거쳐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이때 생질이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함께 탄핵, 파직되자 영천으로 낙향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구암’이라 자호하여 독서와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1537년 복작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독서로 일생을 보내며, 《역학계몽》·《황극경세》·《태극도》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황(李滉)과도 교유하였으며, 도상학(圖象學)과 역학에 밝았다.
영주의 사계서원(泗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암일고》가 있다.
 
2) 나이준(羅以俊)

1602년(선조 35)∼1686년(숙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수성(壽城). 자는 택우(宅于), 호는 매음(梅陰). 아버지는 나용(羅瑢)이다.
1635년(인조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4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태학(太學)의 선비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나 혼자 남아, 성묘(聖廟)를 지키는 정신국(鄭信國)‧박산미(朴潸美) 등을 불러모아 큰 자루를 만들게 하고, 그 속에 위판(位板)‧제기(祭器) 등을 모두 넣고, 또한 성현들의 위판도 함께 받들어 도성을 빠져나왔다.
남한산성에 이르자, 인조는 그의 갸륵한 행위를 가상히 여겨 미포(米布)를 하사하였고, 위판은 개원사(開元寺)에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1637년 환도하자 다시 위판을 받들고 귀환하였다.
1653년(효종 4) 정언이 되었고, 1663년(현종 4) 장령에 이어 수찬‧교리‧보덕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자 부교리가 되었으며, 집의‧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74년(영조 50) 성묘를 지켰다는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사계서원(泗溪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