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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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산천서원(山泉書院)
   영주시 가흥 1동(목골)
   송석충
   1779년
   미상
   
   
정조 3년(1779) 사당을 목계마을에 세우고 송석충의 위패를 봉안 정조 10년(1786) 사림에서 장수희 오운 박회무 박종무의 위패를 봉안하고 산천서원(山泉書院)이라 하였다. 뒤에 네분의 위패를 한천서원(寒泉書院)에 봉안 하였다. 봉안문(奉安文) 상향문(常享文)은 이상정(李象靖)이 짓고 산천서원(山泉書院) 승격시 고유문(告由文)은 이대산(李大山)이 지었다. 서원이 훼철된후 약50년 후에 야성송씨 문중에서 산천서당을 세로 설립을 하고 정지교부 계회도를 봉안하였다. 김세락이 산천서당 기문을 지었다.
봉안위는 생원(生員) 송석충(宋碩忠)이 있다. 1774년에 송석충을 봉안하는 별묘를 창건하여 증참의 장수희(贈參議 狀壽禧), 부윤 오운(府尹 吳澐), 도사 박회무(都事 朴檜茂), 진사 박종무(進士 朴從茂)은 한천서원(寒泉書院)으로 분안(分安)되고 생원 송석충을 단향으로 봉안했다.

송석충
야성송씨가 영주에 터를 잡은 것은 조선 중기 연산군 때이다. 당시 진사 송석충(宋碩忠, 1454∼1524)은 자가 원로(元老), 호는 눌재(訥齋)이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77년(성종 8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등 당대의 명현들과 교유하였다.
연산군 때 세상이 어지러워지며 무오사화가 일어날 기미를 예측하고 낙향하여 지금의 영주시 휴천동에 터전을 닦았다. 그 후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소백산 자락에서 성리학과 역학을 깊이 연구하며 후진을 지도하였는데, 그의 절의와 학행은 고을의 지표가 되었다. 영풍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눌옹유집(訥翁遺集)』이 전하고,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가 간행되었다.



山泉書堂記

剛州治之西南 距十里 蓮花峰之北 有洞 曰牧溪 山繞而窈 水回而抱 洞府淸曠 林巒秀麗 允合藏修之所 往在國朝盛時 冶爐氏刱立牧溪別祠 以享其先祖訥齊先生 旣而 士論齊發 以爲訥翁先生學問名節 宜有士林尸祝 乃陞祠而院 揭號曰山泉書院 歲擧俎豆 不幸見撤於邦禁 荒墟廢址 鞠草茂沒 殆五十年 迺者後孫諸賢 相與謀曰 院之撤 久矣 況値斯世 更無望於天日之重曜 則無寧就舊址 立幾間精舍 時會於斯 聚族於斯 以寓羹墻之慕 不亦恔於心乎 乃鳩材募工 不匝月而功告訖 堂凡八間 中四間爲凉堂 東西各二間爲暖室 室之北粧其半間爲龕 以安情志交孚契會圖 圖卽訥翁在京時 與崔錦南朴靈川申嵩陽諸公 從寒暄堂金先生講學 因講會座次 幷與堂宇花木排布成圖者也 寒暄老先生 儼臨首席 四先生以次列座 題其下曰等年相若 道相似 情志交孚 卽寒暄翁手筆也 諸家藏本 蕩佚於戊甲酷禍之餘 惟訥翁南下時 携致一本 始藏於梁碣之樹屋 後傳于主刱之私第 終乃奉安于泉院之別龕 異哉 此圖之留傳于斯世 有如剝上之一陽 而可見天意之不欲終喪斯道也 其所以粧護虔奉 豈但爲宋氏一家之私而已哉 院之撤 又値一厄會 移奉于廚舍 僕隷易褻 塵煤或侵 多士嗟惜者 屢矣 斯堂之作 實由於是圖之虔奉 則堂成而奉安 又豈非斯文之大幸耶 於乎 今距先生之世 四百有餘祀 屢經禍變 文獻無徵之歎 諸先輩叙述已悉 而以暄翁手筆 有曰道相似 又曰情志交孚 則先生之道 卽暄翁之道也 卽此一言可見先生之學 允爲東方道學之宗嫡 而後學之尊慕先生 此一圖足矣 文籍之無傳 又何足深恨耶 環顧洞房 天步孔艱 民志微定 異說縱橫 千五百年相傳之正脉 幾乎墜地 則斯道之厄 殆有甚於戊甲之禍矣 五先生天之靈 將憑依是圖 徘徊陟降於堂宇之間 而陰騭後生黙誘微衷 俾不爲他敎之所惑 則冶爐氏之所以汲汲於斯堂之役 奉安圖帖 不但爲一家衛先之孝而已 抑有功於衛斯道扶世敎之一端矣 曷不韙哉 役旣完 宋君冑煥甫 以其門老寅鈺啓欽氏之命 致世洛曰 子之先大人鶴沙先生識文 載於圖帖之末 今玆記事之責 子其不敢辭 旣屢辭不獲 不揆僭猥 略叙顚末如右
上章涒灘中陽節 後學 豊山 金世洛拜手謹記

산천서당기(山泉書堂記)

영주의 서남쪽 10리 되는 연화산(蓮花山) 북쪽에 목계(牧溪)라는 마을이 있으니 산에 둘러 싸여서 아늑하고 물이 앞을 돌아 안으니 마을이 깨끗하고 틔어 넓으며 산림이 수려하여 숨어 공부하기에 합당한 곳이다. 옛날 나라가 성하던 때에 야성 송씨(冶城宋氏)가 목계별사(牧溪別祠)를 창립하여 그 선조 눌재(訥齋) 선생을 제향하였다.
그 후에 사림의 공론이 일어나서 눌옹 선생의 학문과 명절은 마땅히 사림의 숭배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별사를 승격하여 산천서원(山泉書院)이라고 편액을 걸고 해마다 제향하였더니 불행히도 서원이 방금(邦禁)으로 훼철을 당하여 황폐한 옛터에는 잡초가 무성케 된 지 거의 50년 만에 후손 제현들이 상의하기를 “서원이 철폐된 지 오래 되었으며 또한 이 세상이 왕조(王朝)의 성대를 만날 가망도 없게 되었으니 차라리 옛터에 몇 칸 정사를 지어 때때로 동족이 이 곳에서 모임을 갖고 선조의 유덕을 추모함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재목을 마련하고 목공을 모집하여 한달이 못되어 준공을 하니 당우(堂宇)는 모두 8칸의 규모로써 가운데 4칸은 마루를 깔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2칸은 온돌방으로 하고 방의 북쪽의 반칸을 꾸며 감실(龕室)로 하여 ‘정지교부계회도(情志交孚契會圖)’를 봉안하였으니 이 그림은 즉 눌옹이 한성에 계실 때에 최금남(崔錦南), 박영천(朴靈川), 신숭양(申嵩陽) 제공(諸公)과 같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따라 강학할 때에 강회하던 좌차(座次)와 집의 형태와 화목(花木) 등을 배포하여 그림을 그린 것이다. 한훤 선생이 엄연히 수석에 임하시고 네 분 선생이 차례로 열지어 좌정하였다.
그 아래에 쓰기를 “우리들은 나이도 서로 같고 도(道)도 서로 같아 정(情)과 뜻이 부합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한훤당이 손수 쓴 글씨다. 여러 집에 소장하던 원본은 무오와 갑자의 사화에 모두 없어지고 오직 눌옹이 남하할 때에 한 본을 지니고 내려와서 허수룩한 나무집에 처음 간수했다가 후에는 주손(主孫)의 사제에 전해졌으며 마침내 산천서원의 별감에 봉안케 되었으니 이상한 일이다. 이 그림이 이 세상에 전해있는 것이 오음(五陰) 위에 일양(一陽)이 있는 것과 같이 아직도 하늘의 뜻은 사도(斯道)를 없애고자 하지 않음이다. 그 그림을 단장하여 경건히 받들어 오는 일이 어찌 송씨 일가의 사적인 일이겠는가?
서원이 훼철된 것은 또한 액회(厄會)를 당한 일이다. 주사(廚舍)에 봉안하니 노복들이 더럽히고 먼지와 그을림에 때묻어서 많은 선비들이 애석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 이 서당을 짓는 것은 실로 이 그림을 경건히 봉안코자 함이니, 서당이 이룩되어 이 그림을 봉안하니 어찌 사문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아! 지금은 선생이 사시던 때로부터 사백여 년이 되었다. 여러번 화변을 겪어서 문헌으로는 찾을 길이 없는 아쉬움은 여러 선배가 자세히 서술하였고 한훤당의 수필에 ‘도(道)가 서로 같고 또한 뜻이 서로 확실하다.’고 했으니 선생의 도는 곧 한훤당의 도인 즉 이 한 말씀으로 선생의 배움이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적통으로 후학들이 선생을 존모함에는 이 그림 하나로도 족할 것이니 문적이 전해오는 것이 없다고 한탄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나라를 돌아보면 천운이 돌아오지 않아서 백성이 뜻을 정할 수 없고 이설(異說)이 종횡하여 1500년 동안 전한 빠른 기맥이 땅에 떨어지고 있으니 사도의 액회가 무오와 갑자의 사화보다 더 심한 것이다. 다섯 선생의 하늘에 계신 혼령이 이 그림에 의지하여 당우(堂宇)의 사이에 배회하고 오르내리시어 후생들의 작은 충정이나마 음으로 도우시어 이단에 미혹되지 않게 하시면 야성 송씨의 이 서당을 급급히 이룩하여 도첩을 봉안하는 일이 다만 한 집안의 위선(衛先)하는 효도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크게는 사도(斯道)를 옹호하고 세교(世敎)를 부식(扶植)하는데 유공한 일단이리니 어찌 장한 일이 아니겠는가?
서당을 짓는 일이 끝난 뒤에 송주환(宋冑煥)군이 그 문로(門老)인 인옥(寅鈺) 계흠(啓欽)씨의 명으로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당신의 선대인(先大人)이신 학사(鶴沙) 선생의 지문(識文)이 도첩의 끝에 올려 있으니 지금 이 기문의 책임도 당신이 감히 사양치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나 여러번 사양을 해도 되지 않아 외람됨을 무릅쓰고 위와 같이 전말을 간략히 쓴다.

경신년(1920) 9월에 후학 풍산(豊山) 김세락(金世洛)은 절하며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