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한천서원(寒泉書院)
   영주시 가흥 1동(한정)
   장수희, 오운, 박회무, 박종무
   1786년
   
   미복설
   

 정조 10년(1786)년 고장사림에서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모여 장수희 오운 박회무 박종무의 위패가 한고을에 산천서원이 있는데 서원을 더 설치할 수 없다고 하여 산천서원(山泉書院)에 같이 봉안하였다. 뜻이 맞지 않아 뒤에 나누어 옛 산천서당(山泉書堂)자리에 서원을 설립하여 봉안하고 한천서원(寒泉書院)이라 하였다. 봉안문(奉安文)은 이급(李級)이 짓고 상향문(常享文)은 이수정(李守貞)이 짓고 한천서원(寒泉書院) 분봉시(分奉時) 고유문(告由文)은 유규(柳 )가 지었다. 지금은 한천서원 사선생 유허비(寒泉書院四先生遺墟碑)만 세워져 있다.
 

1) 오운(吳澐)
1540(중종 35)∼1617(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고창(高敞). 함안 출생.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
수정(守貞)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학정·박사·전적·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경원부 아산보(阿山堡)의 추장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키자 북도조전장(北道助戰將)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그뒤 충주목사 겸 편수관(編修官)을 거쳐 성균관사성을 지낸 뒤 사재감정이 되고, 1589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아갔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수병장(收兵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그때 백령(白嶺)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전후 2만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의령부근의 전투와 현풍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 상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합천군수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명장 진린(陳璘)제독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에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 다시 기용되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진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동고분전한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죽유문집》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 東史纂要》가 있다.
 
2) 장수희(張壽禧)

1516년(중종 11)∼1586년(선조 19),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우옹(祐翁), 호는 과재(果齋).

퇴계 선생이 초곡(草谷)에 계실 때에 장수희(張壽禧)는 여섯 살이었는데 책을 끼고 공부를 하러가면, 매우 친절하고 절실히 가르치셨다. 후에 선생께서 최락당(最樂堂)이란 글씨를 써서 편액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할만한 선을 가득 채워 즐거움에 이르라는 의미였다.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창건에 실로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그 일을 주관하는 12년 간에 규모를 세우고 비용을 보태었다. 모든 절목을 선생에게서 품정받았으니 이는 《퇴계문집》 안에 기록되어 있다. 음직으로 어모(禦侮)직을 지냈으며 향년 71세였다. 형조참의를 증직받았으며 한천사(寒泉祠)에 흠사되었다.

3) 박회무(朴檜茂)
1575년(선조 8)∼1666년(현종 7).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식(仲植), 호는 육우당(六友堂)‧숭정야로(崇禎野老). 목사 박승임(朴承任)의 손자이다.
정구(鄭逑)‧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중후한 성품을 지녀 노성인(老成人)의 기품을 지녔으며,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강화도로 몽진하자 의금부도사로 왕을 호종하였다. 소를 올려 화의를 배척하며 자강(自强)을 도모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또 소를 올려 시정(時政)과 서북관방의 허술함을 논하고 선정양병(選丁養兵)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출정하였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되어, 통곡하며 되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소나무‧전나무‧매화‧대나무‧연‧국화를 심고 애완하며 여생을 마쳤는데, 육우(六友)라는 호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영천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4)삼락당(三樂堂) 박종무(朴樅茂 ; 1582∼1664)
박종무의 자(字)는 계직(季直), 호(號)는 삼락당이며, 영주(榮州) 한정(寒亭)에 거주하였다. 숙고(肅皐)의 손자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 장여헌(張旅軒), 이창석(李蒼石)의 문인이다. 2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경학(經學)으로 여러번에 천거를 받았다. 이괄의 반란에 임금을 공주까지 백형(伯兄)과 함께 호종하였으며 병자란 이후 출사(出仕)의 길을 끊고 연화산에 은거하여 시문(詩文)을 지으며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조정의 기일(忌日)에는 근신하면서 어육(魚肉)을 먹지 않았다. 삼낙사(三樂祠)에 봉향(奉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