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고서원(陶皐書院)-미복설
   경북 영주시 부석면 우곡리
   생원(生員) 황한충(黃漢忠), 사부(師傅) 민응기(閔應祺), 진사(進士) 손흥경(孫興慶), 생원(生員) 권준신(權俊臣), 좌랑(佐郞) 박수서(朴守緖)
   1824년(純祖 24)
   
   불향
   
1824년(純祖 24) 지역사림들이 5분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서원터를 찾을 수가 없다. 박우계(朴尤溪)의 상향축문이 있다고 전한다.

1) 황한충(黃漢忠)
연산군(燕山君) 2년(1496) 병진(丙辰)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3등(三等) 20위로 생원에 입격하였다.
자는 양좌(良佐)이며 거주지는 풍기(豊基)이다. 아버지는 황석(黃錫)이고 승사랑(承仕郞) 훈도(訓導)를 지냈다.
 
2) 민응기(閔應祺)
생몰년 미상. 조선 명종‧선조 때의 학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백향(伯嚮), 호는 우수(尤叟) 또는 경퇴재(景退齋).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선조(宣祖) 3년(15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2등(二等) 19위로 입격하였다.
1565년(명종 20)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어, 선조연간에도 그 직에 머물렀다. 선조 때 그가 《용학석의(庸學釋義)》를 저술하여 왕에게 올리자 왕은 그것을 간행할 것을 명하고, 친히 지은 시를 부채에 써서 하사하였다.
벼슬은 현감에 그쳤으나, 그가 가르쳤던 광해군이 1608년 즉위하여 왕자 때의 사부였던 그를 하락(河洛)‧박광전(朴光前) 등과 함께 추모하면서 제물(祭物)을 내려주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당상관으로 증직하라는 전교가 있어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3) 손흥경(孫興慶)
계묘(癸卯) 1543년에 출생하였으며 자는 경여(景餘) 26살에 선조(宣祖) 1년(1568)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 증광진사 3등(三等) 8위로 입격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고향은 영천(榮川 현 영주시)이다.
부친은 손난(孫蘭)이며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다. 형으로는 손흥국(孫興國)과 손흥록(孫興祿)이 있고 동생으로는 손흥조(孫興祖)와 손흥좌(孫興佐)가 있다.
 
4) 권준신
신유(辛酉) 1561년 출생하였으며 자는 영보(英甫)이고 본관은 안동이며 영주가 고향이다.
선조(宣祖) 15년(158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3등(三等) 64위로 입격하였다.
도은(陶隱) 권호신(權虎臣)의 동생이다.
 
5) 박수서(朴守緖 ; 1567∼1627)
박수서의 자는 경승(景承), 호는 우계(尤溪),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저서로 우계유고가 있다. 이 책은 1910년 9세손 주대(周大)등이 편집, 간행 하였다. 시는 대부분 조정에 출사하여 중신들과 창화한 것인데, 의취가 매우 굳세고 청절하며 담백하다. 「관서도학비변(關西道學碑辨)」은 용만(龍灣) 사람들이 당시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관서일로(關西一路)에 `청덕애민비(淸德愛民碑)`와 `천명도학비(闡明道學碑)`의 쌍비를 세우자 이이첨의 죄상을 준엄히 통박한 글이다. 서는 이개립(李介立)과 한산두(韓山斗) 등에게 보내는 것으로, 시사와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책문은 1만여자에 이르는 장문으로 인재의 등용과 소인들의 양화(釀禍)·농간을 근절하고 공정과 천리로 민생을 보살펴야 한다는 내용이다.
박수서의 아버지는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지(芝)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호군(護軍) 언상(彦商)의 딸이다. 숙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8년 (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97년 정재유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며 항전하였다. 1607년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이 되었고, 1608년에는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으며, 1609년(광해군 1)에 문과에 급제,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에 제수되었다. 1611년 북평사(北評事)를 지냈으며, 1613년에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승차(陞差)되었으나, 그해 4월에 정조(鄭造)·윤인(尹?)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 하자, 그 부당함을 극렬하게 상소하고 귀향하였다. 다시 예조좌랑(禮曹佐郞)과 정랑(正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18년 특명으로 북도순무어사(北道巡撫御史)가 되어 입조(入朝)한 후 북관(北關)으로 가서 민심을 수습, 진무(鎭撫)하고 돌아오니 대비가 이미 폐출되어 서궁(西宮)에 부처되었으므로 곧 소백산 우수동(愚受洞)에 들어가 칩거하였다. 그러나 그 뒤 통례원좌우통례(通禮院左右通禮)와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임명되었으며, 1620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 이해에 북평사를 역임하였고, 그 뒤 우승지 (右承旨)를 거쳐 1621년 분병조참의(分兵曹參議)가 되었다. 이때 조우인(曺友仁)과 함께 입직(入直)하다가 인목대비 유폐에 대한 비판의를 지은 것을 백대형(白大珩)이 이이첨(李爾瞻)의 무리에 고변, 조우인과 함께 피체, 금부에 하옥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1623년(인조 1) 용양위부호군(龍?衛副護軍)에 임명되었으며, 곧 울산부사(蔚山府使)가 되었다. 1627년 우승지가 되어 호란이 일어나자 대가(大駕)를 호위하여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난이 평정된 뒤 돌아왔다. 죽은 뒤 영남사림의 발의로 순흥의 도고서원(陶皐書院)에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