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송곡서원(松谷書院)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
   유방선(柳方善) 곽 순(郭 珣) 이현보(李賢輔) 심지원(沈之源) 이보흠(李甫欽) 윤봉오(尹鳳五)
   1702년(숙종 28)
   
   음력 3월 초정(初丁)
   
1702년(숙종 2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방선(柳方善)과 곽순(郭珣)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묘우(廟宇) 경현원(景賢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원호를 ‘송곡’으로 고치고 1712년(숙종 38) 이현보(李賢輔)·심지원(沈之源)을 모시고, 그 뒤 이보흠(李甫欽)과 윤봉오(尹鳳五)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1965년 유림의 공의로 복원하여 유방선과 이보흠만 배향하였다.
원래 영천시 북습면 원촌리에 북습서당(北習書堂)을 짓고 그 후 송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근년에 청통면 애련리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중건 및 신도비 建立事記에 의하면 “단기4259년(1926년) 현 위치에 서원을 복원하였으나 건물이 老巧하여 영구히 유지하기가 어려워 門會에서 본체를 해체하고 完全改築키로 뜻을 모아 단기4269년 丙子七月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단기4270년(1937년) 丁丑八月下旬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건물의 보존상태, 구조적 짜임이나 치목수법, 참여목수의 활동시기 등으로 보아 근년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매년 三月上丁日에 享祀가 이루어지며 충효교실로 활용하고 있다. 

1)유방선(柳方善, 1388~1443)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 할아버지는 관찰사 후(厚)이고, 아버지는 기(沂)이며, 어머니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국자사마시(國子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409년 아버지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관련된 것으로 연좌되어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영천에 이배되었다.
1415년 풀려나 원주에서 지내던 중 참소로 인하여 다시 영천에 유배되어 1427년(세종 9) 풀려났다. 유배생활중의 학행이 높이 드러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않고 높은 관직에 천거될 수 있는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로 천거되어 주부(主簿)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세 무렵부터 변계량(卞季良)·권근(權近) 등에게 수학하여 일찍부터 문명이 높았다. 특히 유배생활중에는 유배지 영천의 명승지에 ‘태재(泰齋)’라는 서재를 짓고 당시에 유배 또는 은둔생활을 하던 이안유(李安柔)·조상치(曺尙治) 등 문사들과 학문적인 교분을 맺고, 주변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이보흠(李甫欽) 등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즉, 정몽주(鄭夢周)·권근·변계량을 잇는 영남성리학의 학통을 후대에 계승, 발전시키는 구실을 담당한 것이다. 원주에서 생활하던 동안 서거정(徐居正)·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강효문(康孝文) 등 문하생을 길러내었으며, 특히 시학(詩學)에 뛰어났다. 경현원(景賢院)과 영천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태재집≫이 있다.
 
2)곽순(郭珣, 1502~154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백유(伯瑜), 호는 경재(警齋). 성기(成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원(孝元)이고, 아버지는 사재감첨정 수녕(遂寧)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김철단(金哲端)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호조좌랑·진보현감(眞寶縣監)·기주관(記注官) 등을 거쳐, 1543년 서천군수가 되었다. 이듬해 사예(司藝)·사성(司成)·장령(掌令)이 되었다.
그는 장령으로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상소하였으며, 1545년에는 교리·봉상시정·사간을 역임하였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소윤과 대윤간의 세력투쟁이 첨예화하더니 마침내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횡포가 심하자 관직을 포기하고 청도 운문산(雲門山)에 입산하였으나 을사사화 때에 장살 당하였다. 1568년(선조 1)에 관직이 복구되고 영천(永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3)이현보(李賢輔, 1467~1555)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鬢翁). 예안 출신. 참찬 흠(欽)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 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效嚬歌>·<농암가 聾巖歌>·<생일가 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1612년(광해군 4)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가 1700년(숙종 26)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4)심지원(沈之源, 1593~166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 감찰 금(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천부사 종침(宗甚)이고, 아버지는 감찰 설(偰)이다. 어머니는 청원도정(靑原都正) 이간(李侃)의 딸이다.
1620년(광해군 12)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의 족조(族祖)인 종도(宗道)가 대북파(大北派)인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이었던 관계로 대북에 가까웠으나 대북 정책에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듬해 검열(檢閱)에 등용된 뒤 저작(著作)·겸설서(兼說書)·정언(正言)·부교리(副校理)·교리·헌납(獻納)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630년(인조 8)에는 함경도안찰어사(咸鏡道按察御史)로 파견되어 호인(胡人)에게 매마매인(賣馬賣人:말과 사람을 매매함)한 자를 적발하는 동시에 육진(六鎭) 방어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함경도에서 돌아온 뒤에도 응교(應敎)·집의(執義)·교리·부수찬(副修撰)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노모 때문에 뒤늦게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조익(趙翼)·윤계(尹啓) 등과 의병을 모집하려 했으나 윤계가 죽어 실패하였다.
이에 강화도로 들어가 적에 항거하려 했으나 강화마저 함락되자 죽을 기회도 잃게 되었다. 이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1643년 그의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목사로 기용되었으며, 1648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효종 초에 대사간으로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갔으나 대사헌으로 돌아와 병조·이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1652년(효종 3)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그의 아들 익현(益顯)이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듬해 1653년에는 이조판서로서 국왕의 언행이 몹시 급함을 때때로 경계했으며, 11월에는 정조사(正朝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4년 우의정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으로 옮겼다. 1657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1659년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 : 왕이 병이 들거나 사후 어린 왕이 즉위할 때 왕을 보좌하는 원로대신이 맡는 임시 관직)으로서 국정을 맡고 총호사(摠護使)로서 효종 상례의 책임을 졌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왕대비(慈懿大王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쫓으면서도 남인 조경(趙絅)을 적극 신구(伸救:억울함을 펴도록 구원함)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김홍욱(金弘郁)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신구하지 못했다든가 강화설진(江華設鎭)을 반대했다든가, 혹은 양역(良役)의 폐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족(士族)에 대한 수포(收布)에 적극 반대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고 하겠다.
저서로 ≪만사고 晩沙稿≫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과천의 정창연비(鄭昌衍碑)가 남아 있다.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5)이보흠(李甫欽, 1397~145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아버지는 부사직 현보(玄寶)이다.
1429년(세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430년 동부훈도관(東部訓導官)으로서 공법(貢法)의 논의에 참여해 전제(田制)와 세법을 상론하였다. 1434년에는 사정(司正)으로서 우효강(禹孝剛)·김순(金淳) 등의 문사와 함께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박사를 역임하고, 1443년 감찰로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주부가 되었다. 이어 축성법에 대한 건의나 공법 논의 등에 참여하였다.
1445년에는 외직을 맡을 때의 경험 등을 토대로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건의를 해, 사창 제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뒤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8년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의 외직을 맡고 있던 중 사창 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옮겨 최초로 사창법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다.
대구 지방의 효과적인 사창법의 시행으로 ‘순량(循良)’의 칭송을 얻었으며, 문종은 즉위 후 총애하던 그를 임기를 채우지 않고 경직(京職)에 초탁(超擢)하려 했으나 사창제의 계속적 실시를 위해 임기를 마쳤다.
그 공으로 1452년(문종 2) 장령에 초배(超拜)되었고 1454년(단종 2) 직예문관으로서 ≪세종실록≫ 편수의 기주관이 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몰아낸 이후는 지순흥군사(知順興郡事)로 보외(補外)되었다가 1457년(세조 3) 순흥에 유배중인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와 함께 재향품관(在鄕品官)·군사(軍士)·향리(鄕吏) 등 이른바 영남 사인들을 규합해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박천에 유배된 뒤 같은 해 10월에 교살되었다.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인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의 제자인 유방선 (柳方善)에게 출신지인 영천에서 수학한 점, 길재(吉再)의 묘에 문제(文祭 : 以文祭之함)를 지낸 점, 그리고 대구의 수령을 맡을 때 공렴품관(公廉品官) 등 영남 지방의 재향사류(在鄕士類)와 연결해 성리학적 향촌 질서의 이론으로 주자(朱子)가 고안한 사창법을 최초로 실시한 점 등으로 미루어 영남 성리학 학통의 계승 과정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조 때 복관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청도 청안(淸安)의 향사(鄕祠),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6)윤봉오(尹鳳五, 1688~176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계장(季章), 호는 석문(石門). 유건(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비경(飛卿)이고, 아버지는 명운(明運)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판서 봉구(鳳九)의 아우이다.
1714년(숙종 40)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일찍이 왕세제(王世弟 : 영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고, 1746년(영조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필선이 되고, 부수찬·교리를 역임하고 이듬해 홍천현감으로 나갔다가 1759년 동지의금부사·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63년 특진관(特進官)으로 판돈녕부사를 겸하고 176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석문집≫ 8권이 있다.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1) 강당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통칸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1칸씩 온돌방을 드리고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한 중당 협실형 평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청방간에는 2분합문을 드려 출입하고 대청 배면에는 길게 머름을 두어 쌍여닫이 골판문을 설치하고 회벽으로 꾸몄다. 시멘트 기단위에 외진주는 다듬돌 원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내진주는 다듬돌 제형초석 위에 방주를 세워 창방으로 기둥머리를 묶고 소로수장한 삼분변작 5樑架의 짜임을 하고 있으나 종보 없이 대들보 위에 판대공을 높이 올려 종도리를 받치는 것이 이채롭다.
2) 묘우(景賢祠)
정면 3칸, 측면 1칸 평면에 어칸에는 궁판을 들인 쌍여닫이 띠살문을, 좌우협칸에는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내부 통칸에는 우물마루를 깔아 중앙에 태재 유방선의 신위를 주향하고 측면에 이보흠의 신위를 배향하고 있다. 시멘트 기단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소로수장한 3량가 겹처마 맞배지붕의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근년에 단아한 모습의 모로단청을 올려 묘우의 격을 더해주고 있다.
묘우 좌측에는 泰齋柳先生神道碑가 위치해 있다.
3) 관리사 (敬義齋)
정면 3칸, 측면 1칸 평면에 모두 온돌방을 드리고 좌측칸은 입식부엌으로 꾸몄다.
전면에는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고 쪽마루를 부설하여 출입케 하고 좌우측면에 외여닫이 띠살문을 설치하였다. 시멘트 기단위에 제형초석을 놓아 방주를 세우고 장혀수장한 3량가 홑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4) 내․외삼문
① 내삼문 : 세벌대의 장대석계 위로 정면 3칸의 내삼문을 두어 묘우 일곽을 출입케 하였다. 신방목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상부는 골기와로 지붕을 꾸몄다. 긋기단청으로 채색하고 한층 높은 어칸문에는 태극문양을 올렸다.
② 외삼문(崇仁門) : 정면 3칸, 측면 1칸의 평면에 각각 쌍여닫이 중턱대문을 세우고 어칸은 겹처마를 한 맞배지붕의 솟을대문이다. 시멘트 기단위에 원형초석을 놓아 훤칠한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을 묶은 창방 위에 소로를 수장하고 崇仁門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대문 위에는 안상판으로 마감하고 살대를 꽂았다. 

松谷書院重修記
松谷在永山之陰遠近章甫論黨塾輒稱松谷豈非以其賢哉故泰齋柳先生 太宗朝罹文罔編管西原尋量移是郡郡之西山窈而勢阻中焉而廓其有容先生就是谷卜而居之日與門弟子講學不輟由是道遂以南蔚爲嶺海所推宗景泰庚辰旅軒張先生謂先生言行非後人可及謀所以尸祝値兵燹未果 肅宗壬午廟宇始成筵臣白 上而表奬之宣號賜田一如白鹿故事粤若警齋郭先生之盡倫善道大田李先生之夸節卓行聾巖李先生之守正不撓石門尹先生之揚庭孚號彬蔚踵起時異道同此其大略而惟我先祖晩沙先生見幾危邦盡節明時與諸賢前後 美炳若日星且永鄕警齋大田之柔梓而大田學問本之泰齋自聾巖曁我先祖以至石門文翁遺化又在斯郡仁聲所著久而彌遠以次陞享合而 侑一堂六賢隣德不孤焄蒿悽愴歷屢世而洋洋如在其遺風善行可肅鄙薄抑亦斯文之幸歟敦永適尹東京道朝陽祗謁廟貌粗伸羹墻之慕旋東而齋齋爲風雨所圮事巨力綿未遑重建嗚呼李相國㙫卽我先祖宅相也曁孫溵及瀰三節是道於本院事相繼補弊猶懼不逮况以本宗後裔見棟宇傾頹詎不怵然于中圖所以新之者乎於是與一二有司鳩工修擧典祀故廳廢而復理是豈小子淺誠所能及也實諸先生及我先君子所賜也夫
       崇禎後四庚戌孟冬             晩沙相公五代孫 敦永 謹識
 
 
송곡서원중수기(번역문)
송곡은 영산(永山)①의 북쪽에 있다. 원근(遠近)의 유자(儒者)들이 모여 논하는 글방인데 문득 송곡이라 칭한 것은 어찌 그 어짐 때문이 아니겠는가? 예전에 태재(泰齋)② 유방선(柳方善) 선생이 태종(太宗) 때에 문망(文網)③에 걸려 서원(西原)④에 편관(編管)⑤ 되었다가 이 고을에 이배(移配)되었다. 고을의 서산(西山)은 그윽하고 산세가 막혀 있으나 중간이 트이여 공간이 있다. 선생이 이 골짜기에 나아가 집을 정하고 살았다. 매일 문하의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여 그침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道)가 마침내 남쪽에 드높아져서 삼남(三南)의 사람들이 높이고 존경하였다. 경진년(庚辰年:西紀 1580年)⑥에 여헌(旅軒)⑦ 장현광(張顯光) 선생이 선생의 언행(言行)은 후인들이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고 이 때문에 제사를 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마침 병란(兵亂)을 만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숙종(肅宗) 임오년(壬午年:1702)에 묘당(廟堂)을 처음 세우고 경연(經筵)의 신하들이 아뢰어 이를 표창하게 하여 호(號)와 밭을 내리고 한결같이 백록서원(白鹿書院)의 옛일과 같게 하였다. 이에 경재(警齋)⑧ 곽순(郭珣) 선생의 빼어난 윤리와 선한 도의(道義), 대전(大田)⑨ 이보흠(李甫欽) 선생의 높은 절개와 행실, 농암(聾巖)⑩ 이현보(李賢寶) 선생의 정도(正道)를 지키어 흔들림이 없음, 석문(石門)⑪ 윤봉오(尹鳳五) 선생의 조정에 떨친 신임 등이 성대하게 이어져 내려오며 시절은 달라도 함께 걸어 온 길(道)은 같았으니 그것이 대략일 뿐이다.
우리 선조 만사(晩沙) 선생은 위태로운 나라에 충절을 다하여 밝은 시절의 여러 현자(賢者)들과 더불어 전후로 해와 별처럼 아름답고 빛이 났다. 또 영천(永川)은 경재 선생의 고향이요, 대전 선생은 학문이 태재 선생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농암 선생과 우리 선조에서 부터 석문 선생에 이르기까지 주자(朱子)의 교화를 받은 것이 또한 이 고을에 남아 있다. 어진 명성이 드러난 바가 오래 될수록 더욱 멀리 퍼져 차례로 제향하고 합쳐서 제사를 올렸다. 당(堂) 하나에 여섯 현자(賢者)가 있으니 덕(德)이 외롭지 아니할 것이라. 제사를 올리고 슬퍼하며,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도 뚜렷하게 그 유풍(遺風)과 선행(善行)이 있는듯 하여, 부박(浮薄)한 풍속을 숙정(肅整)하여 왔으니, 이는 우리 유학(儒學)의 행운이라 할 것이다.
돈영(敦永)이 경주의 부사가 되어 와서 조양(朝陽)을 지나면서 사당에 배알하고 추모(追慕)의 뜻을 올린 다음, 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재실(齋室)이 비바람에 무너졌는데 일이 크나 힘이 약해 중건(重建)할 겨를이 없었다. 오호라, 상국(相國) 이집(李 )⑫은 곧 우리 선조의 외손(外孫)이요, 그 손자 은(溵)과 미(瀰)와 함께 이 도(道)의 관찰사를 지냈으며, 본 서원의 일에 서로 이어 피폐한 것을 고치려 하였으나, 오히려 힘이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하물며 본 종족(宗族)의 후예가 무너진 기둥을 보고 어찌 슬픈 마음으로 새롭게 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이에 한 두 관리와 모여 수리를 하고 제사를 오렸으며, 옛날 청(廳)은 부서져 다시 고쳤다. 이것이 어찌 소자(小子)의 얕은 정성이 미칠 수 있는 바이리요? 실로 여러 선생들과 우리 선군(先君)께서 내리신 바이리라.
 숭정(崇禎) 후 네 번째 경술년(庚戌年:1850) 초겨울에 만사공의 오대손 돈영이 삼가 쓴다.
 註① 영산(永山):경북 영천의 옛 이름.
  ② 태재(泰齋):유방선(柳方善):조선조 초기의 문신. 태재(泰齋)는 그의 호이다.
  ③ 문망(文網):법망(法網).
  ④ 서원(西原):청주(淸州)의 옛 이름.
  ⑤ 편관(編管):죄를 얻은 관리가 지방의 호적에 편입되어 감시를 받던 형벌. 여기서는 유배를 가리킨다.
  ⑥ 경진년(庚辰年):원문에 『경태(景泰) 경진』이라 하였으나, 경태 연간에는 경진년이 없으며, 장현광의 생애와 전혀 맞지 않다. 만력(萬曆) 연간인 1590년으로 보인다.
  ⑦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조선조 중기의 문신. 여헌(旅軒)은 그의 호로, 학문과 도학에 뛰어났다.
  ⑧ 경재(警齋) 곽순(郭珣):조선조 중기의 문신.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걸려 장살되었다.
  ⑨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조선조 초기의 문신. 유방선의 문인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살해되었다.
  ⑩ 농암(聾巖) 이현보(李賢寶):조선조 중기의 문신.
  ⑪ 석문(石門) 윤봉오(尹鳳五):조선조 후기의 문신.
  ⑫ 이집(李 ):조선조 후기의 문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