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유방선(柳方善, 1388~1443)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 할아버지는 관찰사 후(厚)이고, 아버지는 기(沂)이며, 어머니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국자사마시(國子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409년 아버지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관련된 것으로 연좌되어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영천에 이배되었다.
1415년 풀려나 원주에서 지내던 중 참소로 인하여 다시 영천에 유배되어 1427년(세종 9) 풀려났다. 유배생활중의 학행이 높이 드러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않고 높은 관직에 천거될 수 있는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로 천거되어 주부(主簿)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세 무렵부터 변계량(卞季良)·권근(權近) 등에게 수학하여 일찍부터 문명이 높았다. 특히 유배생활중에는 유배지 영천의 명승지에 ‘태재(泰齋)’라는 서재를 짓고 당시에 유배 또는 은둔생활을 하던 이안유(李安柔)·조상치(曺尙治) 등 문사들과 학문적인 교분을 맺고, 주변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이보흠(李甫欽) 등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즉, 정몽주(鄭夢周)·권근·변계량을 잇는 영남성리학의 학통을 후대에 계승, 발전시키는 구실을 담당한 것이다. 원주에서 생활하던 동안 서거정(徐居正)·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강효문(康孝文) 등 문하생을 길러내었으며, 특히 시학(詩學)에 뛰어났다. 경현원(景賢院)과 영천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태재집≫이 있다.
2)곽순(郭珣, 1502~154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백유(伯瑜), 호는 경재(警齋). 성기(成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원(孝元)이고, 아버지는 사재감첨정 수녕(遂寧)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김철단(金哲端)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호조좌랑·진보현감(眞寶縣監)·기주관(記注官) 등을 거쳐, 1543년 서천군수가 되었다. 이듬해 사예(司藝)·사성(司成)·장령(掌令)이 되었다.
그는 장령으로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상소하였으며, 1545년에는 교리·봉상시정·사간을 역임하였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소윤과 대윤간의 세력투쟁이 첨예화하더니 마침내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횡포가 심하자 관직을 포기하고 청도 운문산(雲門山)에 입산하였으나 을사사화 때에 장살 당하였다. 1568년(선조 1)에 관직이 복구되고 영천(永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3)이현보(李賢輔, 1467~1555)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鬢翁). 예안 출신. 참찬 흠(欽)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 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效嚬歌>·<농암가 聾巖歌>·<생일가 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1612년(광해군 4)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가 1700년(숙종 26)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4)심지원(沈之源, 1593~166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 감찰 금(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천부사 종침(宗甚)이고, 아버지는 감찰 설(偰)이다. 어머니는 청원도정(靑原都正) 이간(李侃)의 딸이다.
1620년(광해군 12)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의 족조(族祖)인 종도(宗道)가 대북파(大北派)인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이었던 관계로 대북에 가까웠으나 대북 정책에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듬해 검열(檢閱)에 등용된 뒤 저작(著作)·겸설서(兼說書)·정언(正言)·부교리(副校理)·교리·헌납(獻納)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630년(인조 8)에는 함경도안찰어사(咸鏡道按察御史)로 파견되어 호인(胡人)에게 매마매인(賣馬賣人:말과 사람을 매매함)한 자를 적발하는 동시에 육진(六鎭) 방어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함경도에서 돌아온 뒤에도 응교(應敎)·집의(執義)·교리·부수찬(副修撰)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노모 때문에 뒤늦게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조익(趙翼)·윤계(尹啓) 등과 의병을 모집하려 했으나 윤계가 죽어 실패하였다.
이에 강화도로 들어가 적에 항거하려 했으나 강화마저 함락되자 죽을 기회도 잃게 되었다. 이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1643년 그의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목사로 기용되었으며, 1648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효종 초에 대사간으로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갔으나 대사헌으로 돌아와 병조·이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1652년(효종 3)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그의 아들 익현(益顯)이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듬해 1653년에는 이조판서로서 국왕의 언행이 몹시 급함을 때때로 경계했으며, 11월에는 정조사(正朝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4년 우의정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으로 옮겼다. 1657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1659년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 : 왕이 병이 들거나 사후 어린 왕이 즉위할 때 왕을 보좌하는 원로대신이 맡는 임시 관직)으로서 국정을 맡고 총호사(摠護使)로서 효종 상례의 책임을 졌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왕대비(慈懿大王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쫓으면서도 남인 조경(趙絅)을 적극 신구(伸救:억울함을 펴도록 구원함)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김홍욱(金弘郁)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신구하지 못했다든가 강화설진(江華設鎭)을 반대했다든가, 혹은 양역(良役)의 폐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족(士族)에 대한 수포(收布)에 적극 반대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고 하겠다.
저서로 ≪만사고 晩沙稿≫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과천의 정창연비(鄭昌衍碑)가 남아 있다.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5)이보흠(李甫欽, 1397~145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아버지는 부사직 현보(玄寶)이다.
1429년(세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430년 동부훈도관(東部訓導官)으로서 공법(貢法)의 논의에 참여해 전제(田制)와 세법을 상론하였다. 1434년에는 사정(司正)으로서 우효강(禹孝剛)·김순(金淳) 등의 문사와 함께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박사를 역임하고, 1443년 감찰로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주부가 되었다. 이어 축성법에 대한 건의나 공법 논의 등에 참여하였다.
1445년에는 외직을 맡을 때의 경험 등을 토대로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건의를 해, 사창 제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뒤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8년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의 외직을 맡고 있던 중 사창 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옮겨 최초로 사창법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다.
대구 지방의 효과적인 사창법의 시행으로 ‘순량(循良)’의 칭송을 얻었으며, 문종은 즉위 후 총애하던 그를 임기를 채우지 않고 경직(京職)에 초탁(超擢)하려 했으나 사창제의 계속적 실시를 위해 임기를 마쳤다.
그 공으로 1452년(문종 2) 장령에 초배(超拜)되었고 1454년(단종 2) 직예문관으로서 ≪세종실록≫ 편수의 기주관이 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몰아낸 이후는 지순흥군사(知順興郡事)로 보외(補外)되었다가 1457년(세조 3) 순흥에 유배중인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와 함께 재향품관(在鄕品官)·군사(軍士)·향리(鄕吏) 등 이른바 영남 사인들을 규합해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박천에 유배된 뒤 같은 해 10월에 교살되었다.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인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의 제자인 유방선 (柳方善)에게 출신지인 영천에서 수학한 점, 길재(吉再)의 묘에 문제(文祭 : 以文祭之함)를 지낸 점, 그리고 대구의 수령을 맡을 때 공렴품관(公廉品官) 등 영남 지방의 재향사류(在鄕士類)와 연결해 성리학적 향촌 질서의 이론으로 주자(朱子)가 고안한 사창법을 최초로 실시한 점 등으로 미루어 영남 성리학 학통의 계승 과정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조 때 복관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청도 청안(淸安)의 향사(鄕祠),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6)윤봉오(尹鳳五, 1688~176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계장(季章), 호는 석문(石門). 유건(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비경(飛卿)이고, 아버지는 명운(明運)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판서 봉구(鳳九)의 아우이다.
1714년(숙종 40)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일찍이 왕세제(王世弟 : 영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고, 1746년(영조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필선이 되고, 부수찬·교리를 역임하고 이듬해 홍천현감으로 나갔다가 1759년 동지의금부사·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63년 특진관(特進官)으로 판돈녕부사를 겸하고 176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석문집≫ 8권이 있다.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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