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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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신천서원(新川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왕신리 412-2
   김영렬(金英烈)
   1945년
   
   매년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中丁日)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139호(1985년 8월 5일)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139호로 지정되었다. 의성 김씨 문중 소유로 문중에서 관리한다. 조선초기의 공신 맹암 김영렬의 뜻을 받들고 후손을 교육하기 위한 학원으로 1945년에 설립하였다. 김영렬은 1400년(정종 2년) 왕위계승을 둘러 싼 왕자의 난인 방간의 난을 평정하고 익대좌명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이 서원은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옥천동에 학계서원을 재건할 때 함께 세운 것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경훈사(景勳祠)·강당(講堂)·남덕문(覽德門)·출입문 등이 있다. 경훈사는 향사(享祀)를 지내는 사우(祠宇)로 정면 3칸·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태종의 어필과 김영열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김영렬(金英烈 1370년 ~ 1421년)
김영렬(金英烈)의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맹암(孟巖)이요, 시호는 양소(襄昭)다. 얼굴이 준수하였으며 재질이 뛰어났다. 천성이 효성스러웠으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한다.
집안의 영향으로 공부에 독실하여 일찍이 경전의 묘리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특히 『소학(小學)』 한 편을 평생 처신의 규범으로 삼아 아주 작은 행동도 그 교훈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일찍이 눈 내리는 밤에 부친과 함께 앉았다가 설야음(雪夜吟)을 읊어보라 명하니, 즉석에서 지어 올리기를, ‘소슬한 겨울밤은 깊어가는데 눈빛, 달빛이 온누리에 가득하다. 유달리 높은 기개가 있기에 저 뜰 앞 소나무는 의연히 서 있도다’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0여 세였으므로 부친이 그에게 충정의 기풍이 있음을 기특하게 여기었다.
그 후에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방문하여서 그의 생김이 출중하고, 시의 기특함을 보고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참으로 훌륭한 사나이다”고 하였다.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도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경서를 논란해보고는 아들 이래(李來)를 맹암에게 보내 함께 강학하게 하였다. 20세 전후에 학문이 통달하고 문장이 뛰어나자 부친이 과거 보기를 권하자 대답하기를 “소년등과는 사실 좋지 못한 일이고, 공자도 나라에 도가 없으면 숨는다 하였으니, 지금 어찌 진취할 때라 여기겠습니까?” 하며 문을 걸고는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문달을 구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그의 성명을 듣고 누차 사람을 보내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나, 26세 때 부친의 간곡한 설득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하륜(河崙), 조영무(趙英茂) 등과 협력하며 국정을 운영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 겸 무신으로 고려 전서로 태조 을해에 문과 등제하여 수군절제사, 안무사, 병조참판을 지내었고, 추충분의익대공신(追忠奮義翊大功臣)으로 녹훈되고 좌찬성을 지냈다. 
1394년(태조 3) 경기우도수군 첨절제사로 재직 중 연해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계책을 올려 이듬해 수군절제사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실책을 범하여 1397년 파직되어 옹진으로 유배, 수군에 충군되었다 이듬해 풀려났다. 1400년(정종 2)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을 때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04년 參判承樞府事로 있으면서 왜선 1척을 노획한 공로로 국왕의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은퇴하여 長湍의 孟洞에 은거하다 죽었다. 義城君으로 봉작되었고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전라도 長城의 鶴林書院에 배향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 시호는 良昭이다. 저서로는 맹암집이 있다.
 

재향공간인 사당 경훈사와 강학 공간인 강당을 비롯한 남덕문, 출입문 등 목조 기와 지붕집 4동으로 일원을 이룬다. 건조물의 양식은 영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집이다. 경외에는 근녀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경훈사에는 어필과 김영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낸다
 
건축 배경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1643년(인조 21)에 전남 장성면 옥천리에 처음 영당(影堂)을 세우고 봉향하다 1718년(숙종 44) 학림서원(鶴林書院)으로 승격시켰는데,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이 서원은 맹암의 후손이 왕신리 ‘새터마을’에 기지를 잡아 단서각(丹書閣) 1동을 세운 것인데, 점차 규모를 확대하여 서원으로 복원하고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건축 구성
서원은 왕신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송림 가운데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방형의 토석 담장 내에 강당과 사당, 남덕문(覽德門), 사주문이 있다. 사주문을 들어서면 강당이 가로막듯 서 있고, 뒤쪽 조금 높은 곳에 토석 담장이 둘러쳐진 곳에 내삼문인 남덕문을 지나면 사당인 경훈사가 가운데에 배치되어 있어 전학후묘의 공간 구성을 이루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대청을 이룬다. 대청의 뒤쪽으로는 반칸 툇마루를 깔았고, 좌우에는 각각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온돌방은 뒤쪽으로 반칸 물려 1칸 반의 크기를 이룬다. 온돌방 앞쪽으로는 마루를 깔아 전면은 4칸 모두 개방된 누각 모습을 이룬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고,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으로, 기둥 사이에는 두짝 살문을 내었다. 앞쪽으로 반칸의 툇간을 두었으며, 자연석 기단과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맹암집
 金英烈의 문집은 원래 조선전기에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때에 없어졌고 뒤에 후손 百祥과 翊中이 집안에 전해온 몇 편의 글과 朴光一의 집안에서 구한 공신기록 등을 자료로 하여 새로이 간행을 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1805년(순조 5)에 후손 世躍이 백상 등이 모은 원고로 문집을 간행하였고 1844년(헌종 10)에 후손 載福 등이 重刊하였다. 그뒤 1969년에 후손 正模와 應煥 등이 다시 ≪실록≫ 등에서 김영렬과 관계된 기록을 찾는 등 몇개의 글을 더 추가하여 새로이 간행하였다. 규장각에는 1969년에 간행된 이 책 외에도 1844년에 간행된 ≪孟巖集≫ <古 3428-547>도 소장되어 있다.

공신교서란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나라에서 공신으로 명한다는 임명서를 말한다. 이 유물은 태종 1년(1401) 2월에 태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데 공이 있는 인물 46명을 좌명공신으로 책봉한 후 개인에게 내린 공신교서와 공신을로 책봉한 후 역대의 3공신인 개국, 정사, 좌명의 공신들이 하늘에 맹세한 후 작성한 회맹록이다. 
김영열(1370∼1421)이 좌명공신 3등에 책봉될 때 공신교서와 공신도감에서 발급하는 인정서인 녹권이 함께 발급되었는데 현재 녹권은 남아 있지 않고 교서만 남아있는 형편이다. 공신교서는 김영열, 이래, 윤목 등에게 내린 교서로 이의 내용은 이들 3인이 박포의 반란시에 공훈이 있는 사적을 간단히 기록한 후 양전 80결, 노비 8명 등을 하사한다고 되어있다. 
이 회맹록은 현재 신천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이다. 좌명공신 1등에 책봉된 하륜(1347∼1416)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었던 회맹록의 원본은 없어진 채『호정집』에 수록되어 있다. 양식은 동일한 것으로, 『호정집』의 경우 이것과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자료는 1401년(태종) 2월 태종(太宗)의 즉위에 유공한 인물 46명을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책봉한 후, 개인에게 내린 공신교서(功臣敎書) 및 공신 책봉(冊封)이후 조선초 이래의 역대 공신인 개국(開國), 정사(定社), 좌명(佐命) 공신(功臣)들이 회맹(會盟)한 회맹록(會盟錄)이다.
김영열(金英烈)(1370, 공민왕 19∼1421, 세종 3년)이 좌명공신 3 등에 책봉될 때에는 공신교서와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한 록권(錄券)이 함께 발부되었으나, 현재 녹권은 남아 있지 않고 공신교서만 남아 있는 형편이다.
시도유형문화재 제305호(경북) 김영열좌명공신교서및회맹록
(金英烈佐命功臣敎書및會盟錄)

공신교서(功臣敎書)는 가정대부지삼군부사(嘉靖大夫知三軍府事) 의성군(義城君) 김영렬(金英烈), 춘추관학사(春秋館學士) 이래(李來), 우장군(右將軍) 윤목(尹穆) 등에게 내린 교서로, 이의 내용은 이들 3인이 박포(朴苞)의 반란시에 유공(有功)한 사적을 간단히 기록한 후 양전(良田) 80결(結), 노비(奴婢) 8구(口) 등을 하사한다고 되어 있다.
회맹록(會盟錄)은 1401년(태종 1년) 2월 당시에 생존하고 있었던 개국(開國), 정사(定社), 좌명 공신(佐命 功臣) 66명이 회맹(會盟)한 후 하늘에 맹세를 한 후 작성한 회맹록(會盟錄)이다.

『맹암집(孟巖集)』
『맹암집(孟巖集)』은 조선 초기 무신이자 학자인 김영렬의 시문집이다. 2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원래 조선 전기에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없어졌고, 뒤에 후손 백상(百祥)과 익중(翊中)이 집안에 전해온 몇 편의 글과 박광일(朴光一)의 집안에서 구한 공신 기록 등을 기초로 하여 새로이 간행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1805년(순조 5)에 후손 세약(世躍)이 백상 등이 모은 원고로 문집을 간행하였고, 1844년(헌종 10)에 후손 재복(載福) 등이 중간하였다.

그 뒤 1969년에 후손 정모(正模)와 응환(應煥) 등이 다시 『실록 』등에서 김영렬과 관계된 기록을 찾는 등 몇 개의 글을 더 추가하여 새로이 간행하였다. 구성으로는 조선 후기에 처음 『맹암집』을 간행할 때 사헌부지평이던 김수조(金壽祖)가 쓴 서문에는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지은 묘비문을 기초로 김영렬의 행적을 서술하였고, 자신의 조상인 김은(金穩)이 김영렬과 함께 학림서원(鶴林書院)에 배향된 인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권 1에서는 약간의 시와 서, 태종이 개국‚ 정사‚ 좌명공신과 함께 공신회맹제 (功臣會盟祭)를 열었을 때에 작성된 회맹록(會盟錄)과 태종이 그리게 한 김영렬의 화상에 대해 심덕부(沈德符), 이원(李原) 등이 쓴 찬문, 묘비문, 행장과 『맹암집』을 간행하면서 간행을 주관한 후손 김세약(金世躍)이 쓴 발문에는, 김백상과 김익중 등이 박광일의 집 등에서 수집한 글이 주된 자료였음과, 김영렬의 이름을 적을 때 ‘英’을 ‘永’으로 적은 곳이 있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