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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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소천서원(蘇川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이 2리 579
   전원발(全元發)
   1692년(숙종 18)
   1701년(숙종 27)
   음력 3월 중정(中丁)
   
이 서원은 전원발(全元發)을 봉향하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1701년(숙종 27)에 건립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다가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고 1918년 중건 되었다가 1968년 복원되었다.

1)전원발(全元發, ?~142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국파(菊坡). 전법총랑(典法摠郎) 충경(忠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총랑(判圖摠郎) 대년(大年)이며, 아버지는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진(珒)이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에 오르고 영록대부(榮祿大夫)에 가자되었다. 뒤에 귀국하여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전원발은 황제를 자주 찾아가 고려는 바다 건너의 작은 나라로 원나라에 바치는 세공이 너무 많아 폐단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귀국할 때도 원나라 황제 순제를 하직하면서, “고려로부터 거두는 세공을 대폭 줄여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순제는 전원발의 애국심에 감탄하여 허락하고, 옷 한 벌을 내려주었다. 그 후 귀국한 뒤 1354년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선이 건국된 후 명 나라에서도 세공을 적게 받았는데, 태조 이성계는 전원발의 이 같은 공을 치하하여 다시 축산부원군에 봉하였다. 전원발은 조선에서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 성화천(省火川)의 맑은 물이 굽이치는 강 동쪽 언덕에 청원정을 세우고, 이곳에서 김득배(金得培), 이제현(李齊賢), 김구용(金九容) 등과 사귀었다. 특히 김득배가 시를 보내왔기에 그 시에 이어서 짓기를 “강물이 넓으니 물고기가 자유롭고, 숲이 깊으니 지친 새가 돌아온다. 고향에 돌아옴은 나의 뜻이요. 부귀의 위태로운 기미를 일찍 안 건 아니어라”고 하였다. 

전원발은 글씨에도 뛰어나서 필적이 남아 있는데, 보은 법주사에 있는 ‘자정국존보명탑비(慈淨國尊普明塔碑)’의 비문이 그것이다. 무덤은 문경군 영순면 오룡리 사현 분퇴동(沙峴分退洞)에 있고, 소천에 ‘국파 전 선생 유허(菊坡全先生遺虛)’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1698년(숙종 24)에 임금이 이르기를, “전원발은 중국에 들어가서 여러 번 우리나라 세공의 폐됨을 아뢰어 지금 편안하게 되었음을 잊지 못하겠으니, 그가 쉬던 성화천을 소천으로 고치라”고 하였다. 사후에 용궁의 소천서원(蘇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작품으로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 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가 있다. 아들에 사복판사(司僕判事) 한(淹)이 있으며, 손자 강(强)·근(謹)·경(敬)은 모두 장원급제하여 청환(淸宦 : 학식과 문벌이 높은 인물에게 주는 벼슬)으로서 현달(顯達 : 높은 지위에 오름.)하였다.

소천서원은 소천마을 북서쪽 금천변 산 밑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은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동일축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강당인 전교당(典敎堂)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고, 사당은 숭덕사(崇德祠)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그 이외에 소천서원과 관련된 소천재(蘇川齋)와 청원정(淸遠亭) 등의 건물이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소천재는 재실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 청원정은 정자건물로 경관이 뛰어나다.

소천서원에는 이황이 지은 시판 1기와 기판(청원정중건기, 청원정중수상량문, 헌성유공종인방명록(獻誠有功宗人芳名錄)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