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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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옥천서원(玉川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덕율리 산1621
   임춘(林椿) 반유(潘濡) 태두남(太斗南) 송복기(宋福基)
   1667년(현종 8)
   
   음력 3월 중정(中丁)
   
1667년(현종 8)에 임춘(林椿)을 향사하기 위해 옥천정사(玉川精舍)로 건립하였으며, 1711년(숙종 37) 유림에서 5동을 건립하고 반유(潘濡), 태두남(太斗南), 송복기(宋福基) 등 3현을 추배하여 4현(四賢)을 배향하여 서원으로 승원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된 것을 1920년 상현사, 명교당을 복원하였고, 1989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매년 음력 3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임춘(林椿, 생몰년 미상)
고려 중·후기의 문인으로 예천임씨(醴泉林氏)의 시조.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문헌을 상고하면 의종 무렵에 태어나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건국공신의 후예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할아버지 중간(仲幹)과 상서(尙書)를 지낸 아버지 광비(光庇) 및 한림원학사를 지낸 큰아버지 종비(宗庇)에 이르러 구귀족사회에 문학적 명성으로 기반이 닦여 있었다.
임춘은 일찍부터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입신할 것을 표방하여 무신란 이전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다가 20세 전후에 무신란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입었다. 그는 겨우 피신하여 목숨은 부지하였다. 그러나 조상 대대의 공음전(功蔭田 ; 고려 시대에, 공신과 오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공을 따져 지급하던 토지)까지 탈취당하였다.
그는 개경에서 5년간 은신하다가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약 7년 여의 유락(流落 ; 타향살이)을 겪었다.
그런 생활 중에서도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벼슬을 구하는 편지를 쓰는 등의 자천(自薦)을 시도하였다. 다시 개경으로 올라와 과거준비까지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와 빈곤 속에 방황하다가 일찍 죽고 말았다.
임춘은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현실인식의 태도에 있어 유자(儒者)로서의 입신행도의 현실관을 견지하였다. 남달리 불우하였던 생애를 군자의 도로 지켜가고자 하였다.
이인로(李仁老)를 비롯한 죽림고회(竹林高會) 벗들과는 시와 술로 서로 즐기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탄식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큰 포부를 문학을 통하여 피력하였다.
임춘의 시는 강한 산문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거의 그의 생애의 즉물적 기술이라 할 만큼 자신의 현실적 관심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가전체소설인 <국순전 麴醇傳>·<공방전 孔方傳>은 신하가 취하여야 할 도리에 대한 입언(立言)이면서 당세의 비리를 비유적으로 비판한 의인체 작품이다.
임춘의 서(書)·계(啓)·서(序)·기 등은 안분지기(安分知機)·가일(可逸)의 경지를 그려내고 있다. <장검행 杖劒行>을 비롯한 장편시들은 불우한 그의 인생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비분의 토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강렬한 현실지향성이 그의 문학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은 투철한 자아인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상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춘은 예천의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다.
문집인 ≪서하선생집≫은 그가 죽은 뒤 지우(知友) 이인로에 의하여 엮어진 유고집으로 6권으로 편찬되었다. ≪동문선≫·≪삼한시귀감 三韓詩龜鑑≫에 여러 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2)반유(潘濡, 1374-1437)
본관은 거제, 용귀(湧貴)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시자(1415), 묘소 앞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무덤 앞에 엎드려 슬피 눈물을 흘리면서 절대로 웃지를 않았다.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는데, 그 정성을 다하는 것은 살아계신 부모를 섬기기보다도 더 어렵기 때문에 맹자께서도 이르시기를, “산 이 섬기기는 오히려 큰 일이 아니지만, 죽은 이 보내는 것이 오로지 큰 일이다.”라고 하였다.
반유가 살던 시대는 고려의 예절이 무너지고, 조선의 새로운 예절이 정립되지 않던 시대였다. 이 때 반유가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남에게 이빨을 보여 웃지를 않고 시묘살이를 했으니, 이는 조선의 풍습을 정립시키고 바로잡은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반유가 과거 시험을 포기한 것도 반유가 살던 시대인 고려 말기가 혼탁하였고, 새로운 세상인 조선에서 벼슬함을 부끄러워하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반유의 절의와 효행이 뛰어나, ‘절효(節孝)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일이 경상도 관찰사에 의해 조정에 알려져 태종 임금께서 정려하여 정문(旌門, 1418)을 내렸고, 성종 임금은 오원도 찰방(烏原道察訪)에 증직(1477)하였다. 정려된 효자각이 보문면 고평리 가시내에 있었으나 홍수로 인하여 보문면 신월리 독제이(讀亭)로 옮겨 세웠다가 다시 고평2리 안골로 옮겨 세웠다(1976).
무덤은 예천읍 용산리 뒷산에 있는데, 묘비(1867)가 세워졌고, 숙종 때 보문면의 옥천(玉川)서원과 용궁면 덕계리의 충효사우(忠孝祠宇)와 달계(達溪)서원에 제향되었다.
 
3)태두남(太斗南, 1486~15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순(永順). 자는 망이(望而), 호는 서암(西菴). 발해국왕 대조영(大祚榮)의 후손이며, 유광(有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생(致生)이고, 아버지는 효정(孝貞)이다.
어려서부터 기재(奇才)가 남달랐으므로, 김양진(金楊震)이 그를 데려와 기르고 훈회(訓誨)하였다. 1513년(중종 8)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형조좌랑·정랑과 개령현감·경상도도사·사예·사도시첨정·전라도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장령·남원부사·선산부사, 직강·사섬시정(司贍寺正)·집의 등을 지냈다. 153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였다.
이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산 스승 김양진의 장례를 정성껏 보살폈다가 미움을 받아 성주목사로 좌천되어 재직중 51세로 죽었다. 담론을 잘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옥천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쇄언 瑣言≫이 있다.
 
4)송복기(宋福基, 1541-1605)
예천읍 고평리 고평(高坪) 마을 사람으로, 자는 덕구(德久), 호는 매포(梅圃), 본관은 야성(冶城), 의(儀)의 넷째 아들,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또한 이황의 생질인 개포 사람 신홍조의 사위이다.
송복기는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었고, 학문이 뛰어나 성균관의 추천으로 소촌도 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부임하지 않았다.
송복기는 시를 잘 지었고, 서예에 능하였다. 그리고 불의와 부정을 싫어하고, 정의롭고 깨끗하게 살았다. 성격이 곧고 발라서 벼슬이나 재산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국가가 위태롭고 어려울 때에는 숨어 있지 않고 투철한 애국심으로 분연히 들고일어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임진왜란(1592) 때에는 예천 군수가 도망하고, 군수 대신 이유가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예천을 지켰으나 용궁 전투에서 전사하자, 송복기가 이유의 후임으로 예천 수성장이 되었다. 수성장이 된 송복기는 군사를 정비하여 유인 작전으로 왜적 수 백 명을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송복기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고평리에 자리잡으면서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며 친구들과 사귀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송복기는 스승 이황의 사랑을 많이 받아 ‘송수재(宋秀才)’로 불리어지면서 스승이 친히 쓴 31폭의 큰 글씨와 병풍 그림의 내용을 읊은 시 8수를 받았는데, 이들은 지금도 가보로 전해온다. 문집이 있고, 무덤은 보문면 신월리 성적골(聖積洞)의 옹정산(甕井山)에 있다. 예천읍 우계리의 광천(廣川)서원(1786), 보문면의 옥천(玉川)서원과 동포정(東浦亭), 봉화의 창계별사(昌溪別社)에 제향되었다.

옥천서원은 긴 진입로와 넓은 경내로 이루어진 큰 규모의 서원으로 주변의 자연경관을 잘 활용하고 식재와 조경정비 등 관리가 양호한 편이다.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외삼문 밖에 다양한 나무와 석물로 이루어진 넓은 바깥마당에 이른다. 특히 외삼문으로 이르는 진입로는 양옆으로 나무로 길을 만들고 바닥에는 호박돌을 깔아 동선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약간 경사로를 이루고 있느 서원 내부는 강당을 중심으로 앞에 동서재를 배치하고 후면에 사당 영역을 두었다. 고직사는 동재의 우측에 있는데, ‘ㄱ’자집 평면을 하고 있다. 건물의 칸살이들이 큰 편이며 각각의 건물규모도 다른 서원에 비하여 웅장해 보이도록 지어졌다.
경내의 건물로는 강당인 명교당(明敎堂), 동재인 흥학재(興學齋), 서재인 함양재(涵養齋), 사당인 상현사(尙賢祠), 외삼문인 천도문(闡道門), 내삼문, 고직사로 이루어져 있다.
 
옥천서원에서 소장하던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