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말익(張末翼)
선생의 휘는 말익(末翼)이요, 호는 매계(梅溪)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니, 도덕박문(道德博文)함이 문(文)이요, 안민입정(安民立政)함은 성(成)이리라. 선생은 고려태사(高麗太師) 충헌공(忠獻公) 포음(圃蔭) 선생의 현손이며, 평장사(平章事) 송계(松溪)선생 휘 지현(之賢)의 다섯째 아들로서 고려 정종(靖宗)때 탄생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이 호부상서문하시중 평장사상주국(戶部尙書門下侍中 平章事上柱國)에 이르렀고 울진부원군(蔚珍府院君)에 봉해 져서 채읍(采邑:城主로 재직)하고 있을 때 청렴결백하게 선치(善治)하여 백성을 사랑하니 믿음과 은혜가 향중에 가득하여 고루고루 돌아가 온 고을 백성이 교화되어 감복하였다. 자손들이 이로 인해 관향(貫鄕)으로 삼아 시조(始祖)로 모셨다.
선생이 삭방도(朔方道) 안렴사(按廉使)로 있을 때 본군 읍성인 산내성(山內城:화성리 성내동)을 순시하니 성내 지형이 협소하여 성(城)을 넓이고 성축(城築)을 높이 쌓았다. 그러나 선생의 풍성한 공적이 마땅히 후세에 빛날 것이나 오랜 지난날 여러번 병화(兵火)를 겪어서 묘소와 문적(文籍)이 전하지 못하여 위대한 업적이 역사에 빛을 보지 못함이 아쉬운 일이나, 월계서원 동쪽 언덕에 자손들이 설단(設壇)하여 매년 3월 3일 삼진에 제향하고 있다.
2)장양수(張良守)
선생의 휘는 양수(良守)이니, 고려태사(高麗太師) 충헌공(忠獻公) 포음(圃蔭)선생의 12세손 이며, 울진부원군(蔚珍府院君) 매계(梅溪)선생 말익(末翼)의 8세손이다. 선생은 1205년 고려 희종(熙宗) 원년 진사시 병과에 급제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典理判書) 상호군(上護軍) 등의 벼슬에 이르렀고 일찌기 중국사신(中國使臣)으로 갔다 온 업적과 나라에 많은 공덕을 남겼다. 선생이 관리등용시험(官吏登用試驗)을 응할 때 문권(文券)들은 전쟁불속에서 소멸되었을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다행이 홍패보첩(紅牌寶牒:급제패지)만은 유일하게 유전(遺傳)되어 문장(文章)과 덕업유풍(德業遺風)이 온 세상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춰주어 흡사 그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알게 되니 보(寶)중에 보(寶)라 아니할 수 없다. 이 홍패 급제패지(及第牌旨)는 779년만인 1975년 10월 13일자로 정부로부터 국보(國寶) 제181호로 지정등록되어 본군 월계서원내(月溪書院內) 국보각(國寶閣)에 소장되어 있어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패지(牌旨) 가운데 가장 오래된 홍패지이며, 행정문서로서 문중의 자랑이요, 울진의 보물이다.
선생의 묘소는 미상으로 본 군 후정2리 매정동(梅亭洞) 용호언덕(龍虎原)위에 후손들이 설단(設壇)하여 제향하고 있으며, 1856년 철종(哲宗) 7년에 향내사림(鄕內士林)들이 호월리(湖月里) 무월동(舞月洞)에 월계사(月溪祠)를 짓고 문성공(文成公) 장말익(張末翼)선생과 함께 봉향(奉享)되어 1862년 철종(哲宗)13년 4월에 예조에 의하여 월계사가 월계서원(月溪書院)으로 승격되고 1868년 고종(高宗)5년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다가 1924년 사림(士林)들이 사당을 고성2리 가원동(佳原洞)에 이건하고 1945년 광복을 맞아 월계서원(月溪書院)이 복칭(複稱)되어 서원내 경덕사(景德祠)에 문성공(文成公)과 함께 매년 10월 중정일(中丁日)에 향례(鄕禮)의 의식에 의한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신도비는 월계서원 남쪽 언덕위에 울진 부원군(蔚珍府院君) 장말익(張末翼)선생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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