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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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빙계서원(氷溪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례3리 산73-1
   김안국(金安國) 이언적(李彦迪)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장현광(張顯光)
   1566년(명종 21)
   1576년(선조 9)
   불향
   
신원록(申元祿)이 그의 스승 주세붕(周世鵬)이 우리나라 최초로 백운동에 서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할 때,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백씨인 정은 신원복(申元福)과 상의하여 인재교육을 위해 장천(長川) 위에다 터를 잡아 서원을 짓기 시작했다. 1566년(명종 11) 장천서원(長川書院)이 의성읍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7년 뒤인 1600년(선조 33) 유림에서 현재 위치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원묘(院廟)를 준공하고 원액(院額)을 ‘빙계(氷溪)’로 고쳤다. 이 때 이언적을 김안국과 함께 제향하였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향리의 선비들이 진소(陳疏)하여 의성과 관련이 깊은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장현광(張顯光) 등을 추향하게 되었다. 그 뒤 1814년(순조 14)에 원묘(院廟)를 중수하였다. 고종 때 훼철된 후 빈터만 남아 있다가,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으로 2006년에 복원되었다.

1)김안국(金安國, 1478~1543)
조선시대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연(璉)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 農書諺解≫·≪잠서언해 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 二倫行實圖諺解≫·≪여씨향약언해 呂氏鄕約諺解≫·≪정속언해 正俗諺解≫ 등의 언해서와 ≪벽온방 辟瘟方≫·≪창진방 瘡疹方≫ 등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태지(苔紙:가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재집≫·≪모재가훈 慕齋家訓≫·≪동몽선습 童蒙先習≫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성리대전언해 性理大全諺解≫·≪농서언해≫·≪잠서언해≫·≪여씨향약언해≫·≪정속언해≫·≪벽온방≫·≪창진방≫ 등이 있다.
2)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참군 수회(壽會)의 손자로, 생원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 소(鷄川君昭)의 딸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1610년(광해군 2)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3)김성일(金誠一, 1538~159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안동 출신. 아버지는 진(璡),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의 이황을 찾아 ≪서경≫·≪역학계몽 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 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堯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 검열·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 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했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고, 이어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친 후 정언의 신분으로 변장(邊將)에게 초피덧저고리를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했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의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해 민원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林氏)·나씨(羅氏)간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이황의 ≪자성록 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에 이어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그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게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김성일은 동인(東人)에 가담,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해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해 남인을 이루었다.
학문적으로 그는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해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으며, 그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전해졌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 家禮≫에 따라 행했으며, ≪두씨통전 杜氏通典≫·≪구씨의절 丘氏儀節≫·≪향교예집 鄕校禮輯≫ 등을 참고해 ≪상례고증 喪禮考證≫을 지었다.
1664년(현종 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 海槎錄≫·≪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4)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출생. 자온(子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 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 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 (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해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지어 올렸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그 해 함경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했으며, 15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다음 해 ≪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 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했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 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내도록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 사신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 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해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 西厓集≫·≪징비록 懲毖錄≫·≪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운암잡기 雲巖雜記≫·≪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 등이 있다.
편서로는 ≪대학연의초 大學衍義抄≫·≪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 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해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 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5)장현광(張顯光, 1554~163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8세 때 <우주요괄첩 宇宙要括帖>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해 23세 때인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 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또 세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해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만에 돌아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 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 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 (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해 왕을 알현했고, 곧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했고 계속해 사헌부대사헌·부호군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죽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그의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사단(四端)이 칠정(七情)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11권, ≪속집≫ 5권, ≪성리설 性理說≫ 6권, ≪역학도설 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 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빙계서원은 강당의 이후면으로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강당과 사당이 일직선축을 이루고 있으며,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숭덕사인 사당과 명교당인 강당, 학이재인 동재, 시습재인 서재, 공수청, 빙월루인 누각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