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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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선암서원(仙巖書院)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335
   김대유(金大有) 박하담(朴河淡)
   1568년(선조 1)
   
    불향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79호(1975.08.18지정) 배자예부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 -보물 제917호(1987.07.16지정) 해동속소학판목(海東續小學板木)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08호(1985.10.15지정)
이 서원은 동창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선암(仙巖)에 자리잡고 있다. 김대유(金大有)와 박하담(朴河淡)을 향사(享祀)하던 곳이다. 초기 창건은 1568년(선조 1) 매전면 운수정(雲樹亭)에 두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하여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다. 이곳은 1577년(선조 10) 군수 황응규(黃應奎)의 주선으로 사우(祠宇)와 위패(位牌)를 옮겨 선암서원이라 개칭하였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지금의 건물들은 1878년(고종 15) 박하담(朴河淡)의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김대유(金大有, 1479~155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 극일(克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執義) 맹(孟)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준손(駿孫)이며, 어머니는 사도시정(司䆃寺正) 고태익(高台翼)의 딸이다. 일손(馹孫)의 조카이다. 조광조(趙光祖)·조식(曺植)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科第)를 삭탈당하였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향리로 돌아가 죽었다.
그는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도 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 濯纓年譜≫가 있다.
 
2)박하담(朴河淡, 1479~156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응천(應千), 호는 소요당(逍遙堂). 아버지는 승원(承元)이며, 어머니는 하숙보(河叔溥)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여러 번 대과(大科)에 실패하자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아래의 눌연(訥淵) 위에 정자를 짓고 소요당이라 명명하고 풍류로써 여생을 보냈다.
조정에서 그의 학행을 듣고 감역(監役)·봉사(奉事)·사평(司評) 등의 직임을 주어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김대유(金大有)와 교분이 두터워 그와 함께 지방에 사창(社倉 : 환곡을 저장하던 창고)을 설치하고 이를 이용하도록 하기도 하였으며,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처형되자 그의 문집을 불태워버렸다. 82세로 죽은 뒤 청도의 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요당일고≫ 5권이 있다.

선암서원은 전형적인 서원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다. 현재의 모습은 제택(第宅)에 서당(書堂)건물이 첨가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서원 공간과 생활공간을 구별하기 힘들다. 훼철 후 중건될 당시 서원이나 사당으로서의 역할보다는 향리 토호(土豪)의 제택 기능이 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면구성은 안채, 득월정(得月亭), 행량채, 대문채가 자를 이루고 그 뒤편으로 북향한 선암서당(仙巖書堂)이 있다. 선암서당의 뒤편에는 장판각이 있다.
 
1)강당
소요당(逍遙堂)이라 불리는 강당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깔았고, 양쪽으로 1칸씩의 방을 설치하였다. 강당 전면에 ‘선암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2)기타
정침은 정면5칸 측면1칸으로 우에서 좌로 부엌, 방, 마루, 방의 순서로 평면이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인 득월정(得月亭)은 정면4칸, 측면1칸의 소규모 건물로 정침과는 토담으로 내 ‧ 외 되어있고 방2칸, 대청2칸의 단순한 평면인데 특히 가구와 헌부(軒部) 구성에 주목할 기법이 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으로 처마는 선자(扇字)가 걸린 귀보다 중앙부분이 튀어나오도록 긴 서가래를 걸었고 대청에 보는 3량 가로 걸작이다. 선암서당의 뒤편에는 장판각이 있다.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과 지방문화재 해동속소학판목(海東續小學板木). 송은(松隱), 우당(憂堂), 소요당(逍遙堂), 제우당(悌友堂) 등 14의사(十四義士)의 문집(文集) 목판(木版)이 보관되어 있다.
 
1)배자예부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 보물 제917호(1987.07.16지정)
시나 운문을 지을 적에 운(韻)을 찾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초사전이다. 주로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들이 참고하기 쉽도록 만들어졌으며, 과거를 맡아보던 부서인 예부(禮部)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송대, 원대로부터 내려오던 책을 우리나라가 수입해 와서 사용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