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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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지산서원(芝山書院)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420
   박 호(朴 虎) 박지현(朴之賢) 박태고(朴太古) 박중채(朴重采)
   1844년(헌종 10)
   
   3월, 9월 중정(中丁)
   
지산서원(芝山書院)은 이서면 신촌동 자양산(紫陽山)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박호(朴虎), 박지현(朴之賢), 박태고(朴太古), 박중채(朴重采)를 향사하기 위해 도내유림의 발의로 4위의 위패[位牌]를 상청사(尙淸祠)에 봉안하고 1844년(헌종 10)에 창건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있었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고 당시 사재인 영모재를 매수하여 지산서원으로 하였다. 1984년에 상청사를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 동편에는 지산서원묘정비(芝山書院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1)박호(朴虎, 1512~1579)
선생의 휘는 호(虎)이오 호는 일청재(逸淸齋)이며 본관은 밀성(密城)으로 일직부사(密直副使) 박양언(朴良彦)의 후예이고 박양무(朴場茂)의 5세손이다.
선생은 1546년(명종 1)에 알성급제(謁聖及第)하여 평해군수(平海郡守)에 오르고 재임 수년동안에 선정을 베풀어서 향민들이 놋숟가락을 모아 주석으로 비를 만들어 선정비를 세워 그 덕을 숭앙하였다. 이 비문이 이르기를 촉군문화요. 무성언현이라. 해취기연에 척유천년이라 하였다 한다. 그 후 을사사화(乙已士禍)로 직을 물러나서 고향에 돌아와 후학들의 훈도에 힘을 다 하였다. 1579년(선조 12)에 향년 68로 졸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평해군민(平海郡民)들이 통곡하며 도포자락에 흙을 담아와서 봉축을 모았다 하는데 지금도 봉축의 크기가 능과 같다. 선생의 선정비는 일제 때 왜인들이 놋쇠를 강제수집하면서 고비도 화를 당해 없어졌으나 그 후 군민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다시 향교 정문 앞에 세웠다. 선생의 졸 후 후손들이 지산서원을 건립하여 향사하였다
 
2)박지현(朴之賢, 1634~1681)
선생의 휘는 지현(之賢)이고, 자는 자겸(子兼), 호는 모효재(慕孝齋)이며 본관은 밀성(密城)으로 박호(朴虎)의 현손이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숙종조에 효행 문학으로 천거되어 장릉참봉에 오르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이 선생의 효행을 가상(嘉賞)하여 모효(慕孝) 두자를 호로 주었으며 그 문인들에 말하기를 자겸(子兼)은 우리 문하의 효도한 선비일 뿐 아니라 유림의 표치(標幟)라 하였다. 향년 48로 졸하니 후에 향림에서 지산서원에 배향하였다.
 
3)박태고(朴太古, 1665~1704)
선생의 휘는 태고(太古)이고 호는 경양재(景陽齋)이며 본관은 밀성(密城)이고 모효재 박지현(慕孝齋 朴之賢)선생의 아들로서 24세의 나이로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우암 선생이 돌아가신 후 향리에 돌아왔다.
선생은 스스로 도방문(圖榜文)을 지어 군수에게 재목(材木)을 청하여 그 재목으로 자양산하(紫陽山下)에 경양재(景陽齋)를 창건하여 은거 강학하여 후진들을 양성 하였는데 선생은 그 때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선생은 숙종 조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때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선생의 문묘배향(文廟配享) 문제를 온 나라 공론이 찬성하였으나 김간(金侃), 이희정(李喜鼎) 등이 문묘배향을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하여 조정을 현혹케 하므로 선생은 재종형제인 상고(尙古), 사고(師古)와 모든 영중유생(嶺中儒生)들과 더불어 변무소(卞誣疏)를 지어 상소하고 또 재소하여 결국 비답(批答)이 내려 문묘에 종향(從享)도록 한 공로가 컸다.
1702년(숙종 28)에 왕명으로 문학재덕(文學才德)이 높은 선비를 천거할 때 일휴재 이숙(逸休齋 李肅)이 감사로 있으면서 선생을 천거하여 준원전 참봉(濬源殿 參奉)에 오르고 이듬해 장녕전 참봉(長寧殿 參奉)을 지냈다.
김대유(金大有)와 합력하여 크나큰 혜택을입혔으며 그 옆에 운수정(雲樹亭)을 지었다.
또 입암 눌연(立巖 訥淵) 위에 소요정(逍遙亭)을 지어 거기에 항시 기거하며 명류(名流)들과 어울렸으니 남명 조식(南冥 曺植),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 경재 곽순(警齋 郭珣), 송당 박영(松堂 朴英), 청송 성 수침(聽松 成守琛),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등 여러 선생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명류(名流)들은 모두 관로를 좋아하지 않고 산수와 자연에 유연자약하였었다. 퇴계 이 황(退溪 李滉)선생이 관로에 나올 것을 청했으나 완곡하게 거절한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도 그 후 청도 운문산하에 선생과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선생을 여러 번 찾아 걸음을 하였다.
그 때 조남명(曺南冥)선생은 시를 보내고 선생은 화답한 시 등을 보면 모두 초연한 인생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노량진(鷺梁津)의 사육신묘(死六臣墓)를 성묘하고 당시 기호(畿湖)의 명류 성수침(成守琛)을 찾아 시를 주고 받았다. 또한 평소에 이웃에서 가까이 지기(志氣)가 상동하던 경재 곽순(警齋 郭珣)선생이 사화(士禍)에 희생되었을 때 가서 단장의 만사를 지었다.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선생과는 우연(愚淵)과 눌연(訥淵)으로 서로 지척간에 거처하면서 더욱 뜻이 같아 아침저녁으로 왕래하고 구경토사(究經討史)하고 태신양성(泰神養性)하였다. 하루는 어성산(禦城山)에서 사냥하고 있을 때 중종대왕(中宗大王)의 승하를 듣고 잡았던 독수리를 놓아주고 시를 지어 망곡하였다. 그 후부터 이 산 이름을 방응봉(放鷹峰)이라 부르게 되었다.
선생이 도주 객관 상량문(道州 客館 上樑文)을 쓰고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선생이 그 중수기를 쓸 때 말하기를 선생과 삼족당 김대유 (三足堂 金大有) 선생의 지기교결을 찬양하였다. 또한 회재 ‧ 퇴계(晦齋 ‧ 退溪) 두 선생과도 문통이 있어 시로 질의 토강하였다. 송당 박영 (松堂 朴英),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 등 여러 선생들도 여러 번 내왕하였다.
이렇듯 당시 청도 산등은 은일 사림파(隱逸 士林派) 학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1560년(명종 15) 11월 가훈십조(家訓十條)를 만들어 자손에게 보이고 세상을 마치니 향년 82이었다. 묘는 수야칠엽에 있으며 묘각은 칠엽재(七葉齋)이다.
돌아가신 후 8년만인 1568년 (선조 1)에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선생과 같이 동창 운수정(東倉 雲樹亭)에서 위패를 봉안하여 향현사(鄕賢祠)라 이름하고 향례를 받들었다. 당시 전국에서는 순흥 소수서원(順興 紹修書院)이 가장 먼저 향사를 받들었지만 청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우(祠宇)이다. 동창 향현사(東倉 鄕賢祠)는 9년 후 1577년(선조 10)에 박씨 자손이 많이 사는 선암(仙巖)으로 옮겨서 선암서원(仙巖書院)이라 하였다. 그리고 소요당 유고(逍遙堂 遺稿) 3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가훈십조(家訓十條)란 ①승지양친(承志養親), ②기경사장(起敬事長), ③형제화합(兄弟和合), ④부부정체(未婦情체), ⑤보본제사(報本祭祀), ⑥충신출언(忠信出言), ⑦독경립행(篤敬立行), ⑧분징계어(忿懲戒禦), ⑨독서불가폐(讀書不可廢), ⑩기업절검(基業節儉) 등 이다.
선생은 정헌대부 이조판서(正憲大夫 吏曹判書)로 증직되었다. 선생의 증직은 원래 광해군(光海君) 때 하교되었으나 폐군으로 이를 시행치 않다가 고종(高宗)때 다시 하교되었다.
 
4)박중채(朴重采)
선생의 휘는 중채(重采)이요 호는 죽옹(竹翁)이며 본관은 밀성(密城)이고 경양재 박태고(景陽齋 朴太古)선생의 아들이다.
선생은 일찌기 학문을 즐겨 자양강당(紫陽講堂)에서 수학하고 연구하여 성리학 (性理學)에 밝고 깊어 성학요서집(堅學要書輯)이란 책을 지어 항상 연구하고 완역(玩 繹)하여 철리를 깨닫고 몸소 수행하고 후학들을 교도하였다.
선생은 효행덕학(孝行德擧)으로 어사(御使)의 천거로 장릉참봉(莊陵參奉)에 특제(特除)되었으나 취하지 않고 학구에 전념하다가 여러 유생들과 더불어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 양선생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소한 공로가 많았다 한다. 또한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선생과 교의가 깊어 시서(詩書) 왕복이 많아 현재 그 친필이 보존되고 있으며 선생이 돌아가시자 만장(晩章)에 말하기를

경내 건물로는 6칸의 상청사(尙淸祠), 신문(神門), 8칸의 경현당(景賢堂), 예도문(禮道門) 등이 있다. 사당인 상청사에는 박호(朴虎), 박지현(朴之賢), 박태고(朴太古), 박중채(朴重采)를 배향하고 있으며, 우측 앞에 지산서원묘정비가 있다. 강당인 경현당은 두 개의 방과 마루로 되어 있는데, 동쪽방은 헌관실(獻官室), 서쪽방은 유사실(有司室)로 사용하고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강당의 출입구는 솟을 삼문형식이 외삼문이며 우측은 온돌방이으로 좌측은 창고로 사용한다. 사당의 출입구는 평삼문으로 규모가 다소 큰 것이 특징이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