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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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송학서원(松鶴書院)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장전1리 658-3
   이 황(李 滉) 김성일(金誠一) 장현광(張顯光)
    1702년(숙종 28)
   
   3월 초정(初丁)
   
 
명지재 민추(明智齋 閔樞)가 세운 명지재서당(明智齋書堂)이 그 효시이다. 명지서당은 불행히도 1631년(인조 9년) 대 화재를 만나 중요한 문적과 함께 전소되었는데 이 때 선생의 손자 가산 민준건(可山 閔後騫-1567∼1631)공이 문적을 구하려다 화마에 휩 쌓여 운명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서당은 1643년경 명당2리 노하 상계(雙溪) 위 서당고개에 다시 중건하게 되었으며(기문 進士 五宜軒 趙咸世), 1702(숙종28)년에 지역의 유림들이 서당을 모태로 하여 송학서원 창건을 도모할 때 서당의 옛터인 복골에 서원을 창건하였으며 이 때 서당을 함께 이건 합병하게 되었다.. 그 터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과 유덕을 기리고, 안덕 당저(堂底)의 외가에 태어난 학봉(鶴峯)김성일(金誠一)과 임진왜란을 피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유풍(儒風)을 진작하고 유교(儒敎)진흥에 많은 공이 있다 하여 청송 유림들이 1702년(숙종 28)에 당저(현 명당3리)에 세우고 세 분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丹陽郡守)로 재임하면서 청송을 동경(憧憬)하여 “청송백학수무분 벽수단산진유연(靑松白鶴雖無分 碧水丹山儘有緣)”이라고 읊은 싯구(時句) 중 “송”와 “학”자를 따서 송학서원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송학서원은 대원군에 의해 1882년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기까지 180년간 청송의 산남(삼자현이남)일대의 유일한 서원으로 인재육성과 유림활동의 구심체로서 그 역할을 다하다가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을 서당으로 격하하고 명지재 선생의 유풍이 사라질까 염려하여 서원을 송학서당과 명지재 서당으로 나누어 송학서당은 장전1리 창말에 이건(1928년)하여 얼마 전 동·서재를 건립하고 담장 등 새로이 정비하였으며 명지재 서당은 명당3리 당밑(棠底))에 이건(1922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 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 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27세(1527)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 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 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선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김성일(金誠一, 1538~159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안동 출신. 아버지는 진(璡),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의 이황을 찾아 ≪서경≫·≪역학계몽 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 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堯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 검열·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 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했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고, 이어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친 후 정언의 신분으로 변장(邊將)에게 초피덧저고리를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했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의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해 민원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林氏)·나씨(羅氏)간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이황의 ≪자성록 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에 이어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그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게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김성일은 동인(東人)에 가담,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해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해 남인을 이루었다.
학문적으로 그는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해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으며, 그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전해졌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 家禮≫에 따라 행했으며, ≪두씨통전 杜氏通典≫·≪구씨의절 丘氏儀節≫·≪향교예집 鄕校禮輯≫ 등을 참고해 ≪상례고증 喪禮考證≫을 지었다.
1664년(현종 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 海槎錄≫·≪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장현광(張顯光, 1554~163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8세 때 <우주요괄첩 宇宙要括帖>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해 23세 때인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 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또 세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해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만에 돌아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 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 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 (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해 왕을 알현했고, 곧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했고 계속해 사헌부대사헌·부호군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죽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그의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사단(四端)이 칠정(七情)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11권, ≪속집≫ 5권, ≪성리설 性理說≫ 6권, ≪역학도설 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 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현존하는 건물은 외삼문과 강당, 동․서재로 이루어져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며, 팔작지붕 홑처마 집이다. 정면은 툇마루로 구성되고 건물 내에는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구성되어 있다. 본 서원의 명칭인 송학서원(松鶴書院) 현판이 걸려있다. 동재와 서재는 같은 규모의 집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정면에는 툇마루가 있다.
 

明智齋 閔 樞 (1526∼1604) : 조선중기의 인물로 본관은 驪興, 자는 천극(天極) 호는 명지재(明智齋) 이며 入靑松 南隱公 興의 曾孫이다.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오봉 신지제(梧峰 申之悌)와 善友 였다. 저서로《德門正路》《太極無極辯》《講義錄》《安仁義仁論》등이 있으나 신미 (1631) 대화재로 전소되어 현재는 전하는 바가 없어 애석하다. 공은 높은 학문과 덕행으로 中樞府事 壽職으로 通政에 除受되었다. <참고문헌 : 청송군지, 입청송 여흥민씨선인록 등>
명지재(明智齋)선생은 일찍이 안동의 고모부 청계 김진(淸溪 金王進 : 1500∼1580 학자, 자는 영중 호는 청계 본관은 의성)에게서 심학(心學)의 요체를 배우고 성균관에서 그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고종 인 ②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과 오랫동안 우의와 학문적인 두터운 교류를 나누었다. 그러나 종조부 신제 민세정(愼齊 閔世貞 : 1471∼1519 효렴과급제, 함길도사)公이 ③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와 동류로 기묘사화를 당하였으므로 종신토록 벼슬에 뜻을 버리고 사학(斯學)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청송에서 서당을 세워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선생의 학문적 위치는 당시 유행했던 영남학파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수양을 통하여 학문의 일가를 이루었으며 그의 많은 문도들이 다시 퇴계 문인들의 문도가 됨으로써 퇴계학이 청송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선생이 서당을 창건할 당시는 중종 때로 안덕면 명당3리(복골)에 창건한 하였으나 창건 얼마 후 1568년에 지역의 유지들이 인재 양성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여 안덕면 장전1리 고산(孤山)으로 확장 이건하고 참봉 서기종(徐起宗) 공이 산장을 맡았으며 선생의 차남 구벽제 민근효( 壁齊 閔根孝-1550∼1630 생원장원.통정: 학봉문인)공이 선생을 도와 후진을 양성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서당은 지역유림의 관리하에 있었으며 여기에 유학자였던 부사 김우굉(金宇宏 - 재임 1583.12∼1586.7 퇴계문인, 충청관찰사), 김홍징(金洪微 : 1599.2∼1601.3)가 서당운영에 많은 재정적인 지원을 하여 당시 일대의 선비 중 그의 문하에서 배우지 않은 이가 없다하리 만큼 수많은 문도들을 배출하였다.
그 중 저명한 인물로는 동계 조형도(東溪 趙亨道 : 1567∼1637, 한강문인, 무과급제, 의금부사, 경주영장. 경산현령)·하음 신즙(河陰 申 楫 : 1580∼1639, 1606 우복문인, 문과급제, 사복시정· 밀양부사)· 풍애 권익(風崖 權 翊 : 사재감정)· 덕계 이준성(德溪 李俊成 : 여헌 문인, 효행으로 정려) 등이 현달 하였는데 특히 동계·하음공은 관직에 나아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에 혁혁한 공훈을 세웠으며 풍애·덕계공은 가사 사정으로 출사치 못하였으나 고향에서 산수를 벗삼아 학문 연마하며 철저한 유자의 도리를 다하여 이 분들의 명성은 4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조금도 변함이 없다.
명지서당은 불행히도 1631년(인조 9년) 대 화재를 만나 중요한 문적과 함께 전소되었는데 이 때 선생의 손자 가산 민준건(可山 閔後騫-1567∼1631)공이 문적을 구하려다 화마에 휩 쌓여 운명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서당은 1643년경 명당2리 노하 상계(雙溪) 위 서당고개에 다시 중건하게 되었으며(기문 進士 五宜軒 趙咸世), 1702(숙종28)년에 지역의 유림들이 서당을 모태로 하여 송학서원 창건을 도모할 때 서당의 옛터인 복골에 서원을 창건하였으며 이 때 서당을 함께 이건 합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