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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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자강서원(紫崗書院)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인평 2리
   유 창(劉 敞)
   미상
   
   한식일
   
자강서원(紫崗書院)은 칠곡군 북삼읍 인평 2리에 있다. 선암(仙庵) 유창(劉敞)을 배향했던 서원으로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71년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서원이 훼철된 뒤 금오산 아래 현 숭오리 숭산마을로 이건하여 숭양재(崇陽齋)라 편액하였다. 이곳에는 단칸 건물의 어필각이 있는데 이 또한 같은 시기에 이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숭오리 숭산마을의 숭양재와 자강사(어필각, 영정각)로만 형태를 알 수 있다. 이건된 자강서원은 숭산마을 남록 경사지에 토석담을 두르고 위에서부터 자강사, 숭양재, 관리사가 일직선으로 놓여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맨 위의 자강사는 선암의 영정과 함께 조선 태종이 친히 ‘공심일시(公心一視)’라 쓴 어필을 보관하고 있다. 현재는 자강사만 남아있고 숭양재는 터만 남아있다.

1)유창(劉敞, ?~142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개국공신. 강릉 유씨(江陵劉氏)의 시조. 초명은 경(敬). 자는 맹의(孟義), 호는 선암(仙庵). 강릉부 우계현(羽溪縣) 출신. 아버지는 지군사(知郡事) 천봉(天鳳)이다.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 성균학유(成均學諭)가 되고, 박사(博士)와 문하주서(門下注書)를 역임하였다. 1375년(우왕 1)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가 되고, 전공좌랑(典工佐郎)·예의정랑(禮儀正郎)·군부정랑(軍簿正郎)을 거쳐, 1389년(공양왕 1) 성균사예, 이어 호조의랑(戶曹議郎)·성균좨주를 역임하였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세울 때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으로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이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옮겼다. 1393년(태조 2) 중추원좌부승지, 다음해 중추원부사를 지내고 옥성군(玉城君)에 봉해졌으며,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1401년(태종 1) 승녕부윤(承寧府尹)으로 소요산에 들어간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했으며, 예문관대제학·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등을 지냈다. 1408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태조가 죽자 수묘관(守墓官)이 되어 3년 간 능을 지켰다.
1410년 길주도찰리사(吉州道察理使)로 나갔다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등을 지낸 뒤 1413년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고, 1416년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1421년(세종 3) 궤장(几杖)을 상으로 받았다.
이성계(李成桂)와 일찍부터 사귀어 그에게 경사(經史)를 강론했으며, 특히 송나라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즐겨 강론해 세도(世道)를 만회할 뜻을 품게 하였다. 개국 후에도 대사성에 있으면서 ≪대학연의≫를 여러 차례 강의해 올렸다.
1393년에 좌산기상시로 있으면서 사직해 선술(仙術)을 공부하겠다고 요청하자, 태조는 “선(仙)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군부(君父)를 버리는데, 그대가 나를 버리면 불충이 되고, 어버이를 버리면 불효가 될 것이다. 그대가 선을 배우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 하고 만류하였다.
성격이 온유돈후(溫柔敦厚)하고, 언행이 근독(謹篤)하며,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이 겸손해 사람들이 당나라의 누사덕(婁師德)에 비유하였다. 저서로 ≪선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이건된 자강서원은 숭산마을 남록 경사지에 토석담을 두르고 위에서부터 자강사, 숭양재, 관리사가 일직선으로 놓여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맨 위의 자강사는 선암의 영정과 함께 조선 태종이 친히 ‘공심일시(公心一視)’라 쓴 어필을 보관하고 있다. 현재는 자강사만 남아있고 숭양재는 터만 남아있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