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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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호서원(龍湖書院)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693
   도성유(都聖兪) 도여유(都汝兪) 도신수(都愼修)
   1704년(숙종 30)
   
   4월 5일
   
1704년(숙종 30) 세덕사(世德祠)로 건립되었다가 1708년(숙종 34)에 서원으로 윤허(允許)되어 용호서원(龍湖書院)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 도성유(都聖兪), 도여유(都汝兪), 도신수(都愼修) 세분을 배향(配享)하였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는 용호서당(龍湖書堂)으로 사용되었다. 1984년 중수하였으며 1988년부터 향사를 재개하여 4월 5일 향사지낸다.

1)도성유(都聖兪, 1571~164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정언(廷彦), 호는 양직(養直). 할아버지는 경상좌우후 흠조(欽祖)이며, 아버지는 병절교위를 지낸 원국(元國)이다. 정구(鄭逑)·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다. 문장과 행실이 당대에 출중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조달하였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난하자, 그들의 무죄를 변호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세상을 등지고 지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오경체용합일도 五經體用合一圖>와 <체용각분도 體用各分圖>를 만들었다. 저서로는 ≪성리정학집 性理正學集≫이 있으며 대구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되었다.

 

2)도여유(都汝兪, 1574~1640)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해중(諧仲)이며 호는 서재(鋤齋)이다. 우윤(右尹) 도원결(都元結)의 아들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서낙재(徐樂齋)의 문하에 드나들며 학문을 배웠는데, 정구가 그에 대해 말하기를 후생(後生) 중에 뜻을 가진 가지는 도여유 뿐이라고 했다. 이괄의 난 때에는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세상과 단절한 채 산림에 묻혀 오로지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아들 도신수(都愼修)와 함께 대구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3)도신수(都愼修, 1598~165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영숙(永叔), 호는 지암(止巖). 경상좌상좌우후 흠조(欽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한성우윤 원결(元結)이고, 아버지는 무공랑(務功郞) 여유(汝兪)이며, 어머니는 여흥이씨로 증판결사 우겸(友謙)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성균관학·학정·박사 등을 역임하고, 참예도찰방(參禮道察訪)에 옮겼다가 임기가 만료되었다. 전적·형조좌랑·공청도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호조정랑·함흥판관·울산부사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역학(易學)을 서사원(徐思遠)으로부터 배웠으며 성장하여서는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수령으로 재임할 때 공무를 신속히 처리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경인년(1650)에 지방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영해부사로 나갔다. 12월 11일에 병이 들어 관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후에 용호서원에 배향되었다.

경내는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서원의 강당인 용호서당(龍湖書堂)이 경사면의 상단에 일곽을 이루고 있고, 하단에는 최근에 건축된 치경당(致敬堂)이 위치한다. 서원으로의 출입은 용호서당의 동쪽에 있는 입덕문(入德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서원입구에는 팽나무가 한그루 있으며 서원경내에는 용호서원유적비가 있다.

 

1)강당

강당인 용호서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중앙의 2칸 마루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안인재(安仁齋)를 서쪽에는 정의재(正義齋)를 배치하였다.

 

2)치경당(致敬堂)

용호서당과는 별도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구조이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