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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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서계서원(西溪書院)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881
   이문화(李文和) 이 주(李 輈)
    1781년(정조 5)
   
   음력 9월 9일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북구(北區) 서변동(西邊洞)에 소재(所在)하는 서계서원(西溪書院)은 1781년 신축(辛丑) 정조(正祖) 5년에 유림(儒林)의 공의(公議)로서 창건(創建)된 서원(書院)이다.
조선조(朝鮮朝) 태종조(太宗朝) 때의 명신(名臣)이요. 이․예조판서(吏禮曹判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을 역임(歷任)하고, 증영의정(贈領議政). 시(諡) 공도(恭度). 오천(烏川)이문화(李文和)(1358~1414)의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을 추모(追慕)하고 상현존덕(象賢尊德)하기 위(爲)하여 봉안(奉安) 천향(薦享)하는 곳이다.
그 뒤 본도(本道) 사림(士林)에서 다시 공론(公論)을 모아 추가(追加) 배향(配享)할 석학(碩學)을 천거(薦擧)하였는데, 선조초(宣祖初)에 이미 대곡정사(大谷精舍)를 지어 강학(講學)의 장소(場所)로 삼고, 1582年에 금호강(琴湖江) 위 창포리(菖蒲里)에 환성정(喚惺亭)을 지어 유학진흥(儒學振興)에 이바지하고,또한 임란(壬亂) 때는 의거(義擧)로써 백의단충(白衣丹忠)을 나타낸 영남(嶺南)의 큰 유학자인 공(公)의 후손(後孫) 태암(苔巖) 이주(李輈)(1556~1604)를 추가(追加) 배향(配享)하게 되었으니 즉(卽) 1801年이다.
창건 이후(創建以後) 매년(每年) 춘추(春秋) 전향(奠享)과 강례수학(講禮修學)을 계속(繼續) 이어 오다가,고종(高宗) 8年 신미(辛未)(1871)에 국령(國令)에 의(依)하여 훼철(毁撤)되었다.
창건 당시(創建當時)의 규모(規模)를 살펴보면, 원호(院號)를 문간공(文簡公) 고동(古東) 이익회(李翊會)판서(判書)가 짓고, 산목헌(山木軒) 김의순(金義淳) 판서(判書)가 원호(院號)를 쓰고, 호동(壺洞) 유언수(兪彦修) 참판(參判)이 사실(史實)을 서술(敍述)하고, 인촌(仁村) 우재악(禹載岳) 참봉(參奉)이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찬(撰)하고, 연안(延安) 김횡(金鑅) 성산(星山) 목사(牧使)가 기문(記文)하였다.

1)이문화(李文和, 1358~141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백중(伯仲), 호는 오천(烏川). 평장사(平章事) 지저(之氐)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전공판서(典工判書) 심(深)이다.
1380년(우왕 6) 문과에 장원 급제해 우정언·우헌납·예문응교를 거쳐 경상도안렴사를 지내고, 공양왕 때 우사의를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간의대부에 등용되고 1395년(태조 4) 검교시중직(檢校侍中職)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1397년 좌승지를 거쳐 이듬 해 도승지 겸 상서윤을 지냈다.
1399년(정종 1) 생원시를 관장하고 이듬 해 첨서의흥삼군부사(簽書義興三軍府事)가 되어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사평부우사로 등용되었으나 분경(奔競)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경상도도관찰출척사로 외방에 나가고 이어 참찬의정부사·사평부우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1405년 예조판서를 거쳐 이듬 해 전라도도체찰사 임무를 대행하고 이어 명나라 황엄(黃儼)의 접반사가 되었다. 1408년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그 해 처녀진헌사(處女進獻使)로 명나라에 갔다.
1409년 형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민무질(閔無疾) 사건에 연루, 면직되었다. 1411년 개성유수로 있을 때 저화(楮貨)에 ‘삼사신판(三司申判)’이라는 글 대신 ‘호조신판(戶曹申判)’으로 바꿀 것을 주장,시행하게 하였다. 1413년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해 참찬의정부사가 되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 장흥의 금계사(金溪祠), 함안의 도천사(道川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2)이주(李輈 1556~1604)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자는 경임(景任), 호는 육휴당(六休堂) 또는 태암(苔巖)이라 하고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문화(文和)의 8대손이자 한강 정구(寒岡 鄭逑) 문인이다. 당대 명유(名儒) 정경세(鄭經世)등과 교유하고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徐思遠)과 함께 창의병을 모집, 군량을 조달하고,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있었다. 뒤에 체찰사(體察使)이덕형(李德馨)의 추천으로 능참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에 묻혀 학문에 전심했다. 또 그는 이숙량(李叔樑)과 함께 연경서원의 건립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3칸의 강학당, 1칸의 서고(書庫), 고직사, 대문 등이 있다 사당은 숭덕사(崇德祠)로 이문화(李文和)와 이주(李輈)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강학당은 화수정(花樹亭)이라 칭하는데 1924년에 중건된 건물이다. 동재는 금수랑(琴水廊)이라 칭하며, 문헌과 가보를 보관하고 있다. 서재는 희리당(希理堂)이라 칭하며, 창포리에 있는 환성정(喚惺亭)을 옮겨온 것이다. 서고는 부용장(芙蓉帳)이라 하며, 고직사는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다. 넓은 뜰에는 정원수(庭園樹)로 조경(造景)하였고 대문인 향의문(向義門) 곁에는 서계서원 사적비(西溪書院 事蹟碑)를 세웠다.
 
숭덕사
1781년(正祖 5)에 인천인(仁川人) 대제학좌참찬 증영의정 시호공도공 오천 이문화(大提學左參贊 贈領議政 謚號恭度公 烏川 李文和)를 주벽(主壁)으로, 그의 8세손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창의(倡義)한 태암공(苔巖公) 를 배향(配享)한 서계서원(西溪書院)이 1864년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1924년 문중에서 양위(兩位)를 배향(配享)하는 재사(齋舍)로 화수정(花樹亭)을 건립하였다.
조선말의 명필인 윤용구(尹用求)가 쓴 현판이 아직 남아있다. 그러다가 1992년 문중에서 훼철된 옛 자리에 사우(祠宇)인 숭덕사(崇德祠)와 함께 서계서원(西溪書院)을 복원(復元)하였다.
정침(正寢)은 방 3칸, 대청 3칸, 측면 2칸인데 원주(圓柱) 주춧돌 위에 홑처마 팔작지붕의건물이 화강석 기단 위에 건립되었다. 환성정(喚惺亭), 화수정(花樹亭)과 돌담으로 같은 경내(境內)를 이루고 있으며 넓은 뜰에는 정원수(庭園樹)로 조경(造景)하였고 대문인 향의문(向義門) 곁에는 서계서원 사적비(西溪書院 事蹟碑)를 세웠다.
 
 
환성정(喚惺亭)
소재지 : 대구시 북구 서변동 881
喚惺亭은 壬辰倭亂(1592-1598)때 大邱地方에서 義兵將으로 活躍한 의 亭閣이며 이주는 朝鮮의 學者이며 字는 景任, 號는 六休堂 苔巖이고, 當代 名儒 鄭經世 等과 交遊하고 性理學을 硏究했으며, 宣祖 25年(1592)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徐思遠과 함께 倡義兵을 募集 軍糧을 調達하고 소유사 金誠一의 소모관으로 있었으며 뒤이어 채찰사 李德馨의 推薦으로 朝廷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굳이 이를 辭讓하고 鄕里에 묻혀 學問에 專念했으며 西溪書院에 配享되었다.
건물은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굴도리집으로 전면어간(前面御間)과 좌측래문(左側來門)은 온돌이고 우측래문(右側來門)은 루(樓)마루로 높이 50㎝ 되는 화강석 장초석 위에 원주(圓柱)를 놓았으며 가구(架構)는 5량(樑)이다.
宗(종)마루는 사다리꼴 판대공으로 받쳐있고 팔작지붕이다. 환성정(喚惺亭) 현판은 대원군(大院君)의 친필(親筆)이다.
오천실기(烏川實紀) 외 200여권의 고문헌이 소장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서계서원사적비명(西溪書院事蹟碑銘)
이곳은 옛날 西溪書院(서계서원)의 遺址(유지)이다. 西溪書院(서계서원)은 朝鮮(조선) 太宗朝(태종조) 名臣(명신) 恭度公(공도공) 烏川 李先生(오천 이선생)을 主享(주향)으로 하고, 先生의 八世孫인 苔巖 李公(태암 이공)을 配享(배향)으로 한 書院이었다. 烏川先生은 諱文和 字伯中(휘 문화 자 백중)이니 仁川人이다. 高麗 恭愍王(고려 공민왕) 七年 戊戌生(무술생)이니 高麗 尙書左僕射 上柱國 邵城縣 開國後 諱 許謙(고려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 휘 허겸)의 十四世孫이요 中書舍人知制誥 諱 益歲(중서사인지재고 휘 익세)의 孫이요 典工判書 諱 深(전공판서 휘 심)의 子이다.
 
어려서 栗亭 尹澤(율정 윤택) 先生에게 受學하였고, 커서는 牧隱 李穡(목은 이색)과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 兩 先生 門下에 從遊(종유)하였고, 陽村 權近(양촌 권근), 陶隱 李崇仁(도은 이숭인), 桑村 金自粹(상촌 김자수), 諸賢(제현)과 道義交(도의교)로서 文章經術(문장경술)이 當世(당세)에 드러나시었다. 朝鮮 太宗朝(조선 태종조)에는 諫議大夫 京畿道 按廉使 都承旨(간의대부 경기도안렴사 도승지)를 歷任(역임)하였고, 太宗朝에는 禮戶刑曹判書(예호형조판서), 嶺湖南按廉使(영호남안렴사), 左參贊議政府事(좌참찬의정부사)를 거쳐서 藝文館, 成均館大提學(예문관 성균관대제학)을 지냈다.
 
太宗十四年 甲午에 考終(고종)하시니 享年(향년) 五十七歲였다. 大匡輔國崇錄大夫 議政府領議政(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贈職(증직)되었고 諡恭度(시공도)라 내리었으니 즉, 尊賢貴義曰恭(존현귀의왈공)이요 心能制義曰度(심능제의왈도)라는 諡法(시법)에 依(의)한 것이다.
 
苔巖公(태암공)은 諱字景任(휘주자경임)이요 又號(우호) 六休堂(육휴당)이니 明宗 丙申生(명종 병신생)으로서 全溪東慶昌(전계동 경창) 門下에 從遊(종유)하였고 鄭寒岡 逑(정한강 구), 張旅軒 顯光(장여헌 현광), 徐樂齋 思遠(서낙재 사원), 諸賢(제현)과 道義交(도의교)로 지내더니 壬辰亂(임진난)이 일어나자 義憤(의분)을 참지 못하여 徐樂齋 思遠(서낙재 사원), 孫慕堂 處訥(손모당 처눌), 郭槐軒 再謙(곽귀헌 재겸), 蔡投巖 夢硯(채투암 몽연), 朴摠管 忠後(박총관 충후), 李軍威 宗文(이군위 종문), 崔萬頃(최만경) 諸公(제공)과 뜻을 모아 義兵(의병)을 일으켜서 公事員(공사원)으로서 大將(대장)에 推戴(추대)되었다. 解顔倉(해안창) 占據倭兵(점거왜병)을 討伐(토벌)하여 倭首(왜수) 三名과 賊卒(적졸) 百餘給(백여급)을 (참괵)하였고, 漆谷 八(칠곡 팔거)에서 三戰三捷(삼전삼첩)의 戰功(전공)을 세웠고, 全羅道 長水(전라도 장수)에서 數千 倭兵을 물리쳐서 招諭使(초유사) 鶴峯 金誠一(학봉 김성일)과 體察使(체찰사) 漢陰 李德馨(한음 이덕형)에게 크게 奬許(장허)를 받았다. 亂靖後(난정후)에는 褒薦(포천)을 굳이 辭讓(사양)하고 山林에 돌아가서 한 讀書士(독서사)로서 大邱鄕校(대구향교)를 重建(중건)하고 各處(각처) 祠院(사원)을 補修(보수)하여 後進養成(후진양성)과 鄕學振興(향학진흥)에 힘을 다하였다. 愚伏 鄭經世(우복 정경세)先生은 本道 觀察使(본도 관찰사)로 와서 南來得一畏友(남래득일외우)라 하였고 忠翼公 李時發(충익공 이시발)은 斯文鼎新 扶植吾道(사문정신 부식오도)라 하였다. 宣祖 甲辰 二月二十七日에 卒하였다.
 
이 西溪書院이 이룩된 것은 正祖 五年 辛丑 西紀 一七八一年에 士林(사림)의 公議(공의)에 依하여 烏川(오천)先生 獨享(독향)으로 創設(창설)되었다가 二十年後인 純祖 元年 辛酉 西紀 一八0一年에 苔巖公(태암공)을 配享(배향)하였다.
 
創建以後(창건이후) 八十八年間을 士林(사림)과 姓孫(성손)들의 極盡(극진)한 誠意(성의)로 春秋奠享(춘추전향)과 講禮修學(강례수학)을 지키어왔으니 兩先生의 扶國扶敎(부국부교)의 精神(정신)이 이 南州一帶(남주일대)에 길이 남을 일이어늘 滄桑世劫(창상세겁)은 尊賢慕義(존현모의)도 持續(지속)하기 어려웠는지라 高宗戊辰 西紀 一八六八年에 書院毁撤令(서원훼철령)에 依하여 荒凉(황량)한 草原(초원)으로 廢墟(폐허)만이 남게 된 것이다. 姓孫(성손)들의 罔極(망극)과 士林(사림)들의 失意(실의)는 憤鬱(울분)의 情(정)을 참지 못한 것이 우금(于今)百二十年이라. 姓孫(성손)으로서나 士林(사림)으로서나 當然(당연)히 復元(복원)을 꽤할 일이었지만은, 事大力綿(사대역면)하여 爲先(위선) 이 돌을 세워서 遺蹟(유적)을 밝히고 復元事業(복원사업)은 앞으로 國家(국가)의 安定(안정)과 文敎(문교)의 再興(재흥)을 기다려서 이룩될 날이 있으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光復後 四十三年 丁卯秋 西紀 一九八七年
眞城后人 李壽洛 謹撰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 
 
임진년 서계서원 향사 ( 음 9월 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