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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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덕산서원(德山書院)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258
   서 섭(徐 涉) 서감원(徐坎元)
   1995년
   
   음력 구월 초이일(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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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서원(德山書院)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258 소재의 재실로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절개를 지켰던 남은 서섭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그는 세종대 대과에 급제했으며, 단종때에는 이조판서까지 올랐으나,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연을 벗삼아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의 충절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서원을 세우고 향사를 지내니 대표적인 곳이 무주의 분양서원, 영일의 중앙서원이다. 수성구의 덕산 서원은 후손들과 사림들이 뜻을 모아 1926년 에 선생의 묘소가 있는 황금동 무학산 동쪽 형제봉 아래에 첨모재를 건립한 것을 1954년 8월 중수하였다.
1993년 유림에서 다시 공의하여 지금의 덕산서원으로 확장함으로
현재는 첨모재가 덕산서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94년에 경모사를 준공하고  95년부터 덕산서원에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1)서섭(徐涉)
선생의 휘(諱)는 섭자(涉字) 이시고 호는 남애(南厓)이셨는데 패관자정(掛冠自靖)하신 뒤에 남은(南隱)으로 고치셨으며 달성서씨이십니다.
상조(上祖)의 휘(諱)는 진자(晉字)이시니 고려 봉익대부 판도판서 달성군(奉翊大夫 版圖判書 達城君)이시고, 이세조(二世祖)의 휘(諱)는 기자준자(奇字俊字)이시니 승봉랑 도관좌랑(承奉郞 都官佐郞)을 지내시고 문하시중찬성사 달성군(門下侍中贊成事 達川君)에 추봉(追封)되셨는데 이 어른이 선생의 오대조(五代祖)이십니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영자(穎字)이시고 호는 노남(櫓南)이시니 달성군으로, 중대광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찬성사(重大匡 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贊成事)를 지내시고 시호(諡號)는 충정공(忠靖公)이십니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균자형자(鈞字衡字)이시고 호는 학암(鶴巖)이시니, 김난계선생(金蘭溪先生)의 문인으로 공민왕 구년 경자(恭愍王 九年 更子(서기 1360))에 정포은 이석탄 제현(鄭圃隱 李石灘 諸賢)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시고, 직제학 이부상서 정당문학 양광도관찰사(直提學 吏部尙書 政堂文學 楊廣道觀察使)를 거쳐 벼슬이 순충논도좌명공신 상의문하찬성사 세자사부(純忠論道佐命功臣 商議門下贊成事 世子師傅)에 이르셨으며, 시호는 정평공(貞平公)이신데 부자분이 함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셨습니다. 조(祖)의 휘(諱)는 침자(沉字) 이시고 호는 구계(龜溪)이시니, 정포은선생(鄭圃隱先生)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전공하시고 조봉대부 전의소감(朝奉大夫 典醫少監)을 지내셨고, 통정(通政)으로 조선 세종때 재조(才操)와 덕망으로 삼남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에 발탁제수(拔擢除授)되셨습니다. 이때 구계선생(龜溪先生)의 거지(居地)인 달성(達城)이 천작(天作)으로 성지(城池)가 될 수 있다하여, 왕명으로 대구 남산 고역기(古驛基)와 교환(交換)하고 인근 몽리답(蒙利畓)에서 거두어 들이는 세곡을 주고, 장차 대대로 녹봉을 더 하겠다 하였을 때, 구계선생은 조정의 보상 제안을 모두 사양하시고 그 대신 조정이 대구부민에게서 거두어들이는 환곡의 이자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세종께서 크게 칭찬하시고 윤허하셔서, 환곡이자가 매석당 일두 오승인 것을 오승씩 감해주심으로써, 대구부민들은 영세토록 구계선생의 은택을 입었고, 대구부민의 공의로 구계선생은 구암서원에 배향되시었습니다.고(考)의 휘는 문한(文翰)이시고 호는 쌍죽당(雙竹堂)이시니, 문과에 올라 승사랑 광흥창부승(承仕郞 廣興倉副丞)과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현감을 지내셨습니다.
선생은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대호군(大護軍)을 거치시고, 벼슬이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에 이르셨는데, 집현전학사들과 함께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으셨고, 문종조를 거쳐 단종께서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시자, 정치적 정세를 미리 간파 하시고 단종에게「척간소(斥姦疏)」를 올려 말을 다했는데, 그 내용은 주로 왕족의 발호(跋扈)와 간당(간당)의 선란(煽亂)을 통열(痛烈)히 배척하시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할 것이며 집현전 제신들을 등용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불우지변(不虞之變)을 막아야 한다는 등이었습니다. 그 대략을 말하면『선왕의 고명(顧命)이 지금까지 귀에 남았아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집현전 신하를 복심(腹心)과 고굉(股肱)으로 삼으시면 나라에 걱정이 없을 것이오이다.』라고 하시었고, 또 말하시기를『왕족이 비록 왕실을 보호하는 번신(藩臣)이라고 하오나, 주나라에 관숙(管叔) 채숙(蔡叔)의 반란이 있었을 때 주공이 바로 잡았고, 한나라에 오초(吳楚)의 변란이 있었을 때 주아부(周亞夫)가 평정 했으니, 재상을 뽑고 장수를 선택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시기 바라옵니다.』라고 하셨다. 이 상소로 인하여 유배 되셨다가 곧 몽유(蒙宥)를 받았으나, 때는 이미 삼상(三相)이 죽고 대세는 기울어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사(時事)가 크게 그르게 되자 드디어 사직하시고 고향인 대구로 돌아 오시니, 백씨(伯氏)이신 현감공 휘 제자(縣監公 諱 濟字)께서 함께 자정(自靖)하셨는데, 그 후 육신(六臣)의 순절(殉節)을 들으시고 읊은 시에『남아로서 세상에 살아도 면목이 없구나!』라고 한 구절이 있고, 영월의 참변을 듣고 통곡하며 읊은 시에『부끄럽구나 못난 신하 세상에 살아 남다니』『후일 지하에서 무슨 낯으로 선왕을 뵈오리?』라는 구절이 있고, 망경루음(望京樓吟)에『죽지 않고 뭘 하려나? 백발 늙은이』라고 한 탄식이 있으며, 두견새 소리를 듣고 읊은 시에『밤마다 외로운 신하 눈물 금치 못하네』라는 심회(心懷)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라 일에 통분 개탄하느라 가슴에 답답한 기운이 맺힌 것이 병이 되었고, 백형께서 먼저 돌아가시니 선생께서 제문을 지어 통곡하며 말하시기를『아침 저녁 머리 맞대고, 맹세코 살기 도모하지 말자 하시더니, 서산(西山)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은거한 수양산)이 어디 있는고? 나도 또한 이를 따르리로다.』하시면서 국사의 통분함을 이기기 못하셔서 세상을 마치셨습니다. 남은 글 여러 편은 모두 피맺힌 충성으로 쓴 것이니, 대개 그 의리는 사육신의 충성이요, 그 행적은 생육신의 절의였다. 다만 후손들이 영체되고 유적이 늦게 나타나 포상의 은전이 아직 빠졌으나, 굽혀지고 펴지는 것은 도요, 드러나고 숨겨지는 것은 때(時)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에 통달한 군자나 때를 알고 여론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지금에 이르도록 애석해 하는 것이다. 묘소는 대구 수성구 황금동 경좌원에 계시고, 배 정부인 인천채씨는 예조참의 휘 윤자(崙字)의 따님이요, 다의당 휘 귀자하자(多義堂 諱 貴字河字)의 증손으로 묘소는 동국 간좌(同局 艮坐)에 계십니다. 남은선생 문집이 세상에 전하고, 무주(茂朱)의 분양서원(汾陽書院)과 영일(迎日)의 중양서원(中陽書院) 그리고 대구의 덕산서원(德山書院)에 배향되셨습니다. 선생의 사적(事蹟)이 단종사보(端宗史補)와 장릉사보(莊陵史補)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2)서감원(徐坎元)
공의 휘(諱)는 감자원자(坎字元字)이시니 달성서씨(達城徐氏)로 남은선생의 둘째 아드님이십니다. 일찍이 잠영세가(簪纓世家)에서 출생하시어 생원과(生員科)에 오르시고, 성균관에 거재하시면서 큰 뜻을 품으셨는데, 선군의 연고로 초야에 물러나 고수동강(固守東岡)의 지조를 지키셨다. 비록 직위가 조정에 계시지 않으셨으나 가풍에 젖어시고 정학을 연구하셨으니, 좋은 말씀과 착한 행실 숨은 덕과 그윽한 빛이 반드시 문자간에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족보의 기록에는 다만 성균생원이라고만 기록 되었을뿐, 생졸과 자호가 적히지 않았고 문집초고를 간수한 것이 없으니, 실로 루백년(屢百年)의 의심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근래에 성종실록을 보니 성종조에 나라에 큰 재변이 있자, 조정에서 구언하였는데 공께서 직언으로「구언소(求言疏)」를 올리셨습니다. 성종실록 갑진(성종15년/서기1484) 팔월 병진조에 공이 올린 봉사(封事)의 대략(大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조정의 실정과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고자 말을 다하셨는데 그 개략을 말하면, 조정의 부당한 인사에 대하여 말하기를『강직한 신하는 물러나 초야에 처하고, 소외되어 멀리 있는 신하는 나아갈 길이 없어, 임금이 폐백을 갖추어서 신하를 부르는 예가 세상에 행해지지 않으니, 무릇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이옵니까?』하시었고, 또 신하의 간언에 대한 임금의 자세에 대하여 말하시기를『주공이 재상이 되어 정치의 기강을 세우는 글을 은근하고 간곡하게 진술하매 성왕은 가납(嘉納)했사옵니다. 그런데 지금의 재상들이 과연 주공의 마음과 같사옵니까?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주상께서 신하를 대우하심이 과연 능히 성왕이 주공에게 하신 바와 같으시옵니까?』하시었고, 또 임금의 사치에 대하여 말하시기를『지금 토목의 일이 자주 일어나 나무와 돌을 운반하느라고 내는 목도 소리가, 도로에 끊이지 않고 백성의 집을 헐어버리는데 이르기까지 하는 실정이옵니다. 그리하여「떠나서 어디로 가랴?」하는 백성의 탄식이 있으니, 슬퍼할 만하기가 심한 것이옵니다. 경복궁은 곧 선조왕께오서 처음 세운 것으로, 성자신손(聖子神孫)이 여기에서 팔짱을 끼고 나라를 다스리고, 여기에서 정사를 부지런히 하게 하고자 하던 곳이었사옵니다. 궁궐이 부족함도 아니요 정원이 넓지 않은 것도 아닌데, 더욱 궁궐을 넓혀 짓고 널리 정원을 점유하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이옵니까?』하시었고, 또 임금이 정학을 소홀히 함에 말하시기를『이단이 그치지 않으면 유도가 밝지 못한 법이 옵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초년에 이단의 의식을 혁파하시고, 또 홍문관에 명하여 역대 왕조에서 이단을 배척하는 상소문을 모아 아뢰게 함에, 신민이 모두 우리 유도가 날로 성행하고 이단이 날로 쇠망할 것을 알게 되어, 태평의 치세를 바랐던 것이 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점점 처음과 같지 못하옵니다』하시었고, 또 군사의 제도에 대하여 말하시기를『경전에 말하기를「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상례로서 부모상에는 귀천이 없이 동일하다.」하였사옵니다. 그런데 이제 군졸들은 어버이의 상을 당해도 겨우 백일을 넘기면 상복을 벗고 길례를 따르며 화살를 지고 창대를 메고 군사의 대열에서 분주해야 하옵니다. 부모의 상을 당한 자식으로서 애통해 하는 마음이 이로 인해 줄어드니 어찌 인정의 큰 누가 아니겠습니까?』하시었고 또 관리에 대하여 말하시기를『임금과 더불어 함께 백성을 편하게 하기로는, 수령보다 앞서는 이가 없다고 하옵니다. 수령에 온당한 사람을 얻으면 백성이 그 혜택을 받고, 진실로 그럴 만한 수령이 아니면 백성들이 그 해로움을 받는 것이니, 실로 수령의 직책이 막중하옵니다. 옛 사람의 말에 근원이 맑으면 말류도 맑다고 하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전하께오서 먼저 조정을 바르게 하시고 백관을 바르게 하소서. 백관이 바르면 감사가 자연히 바르게 되고 수령이 저절로 바르게 되리이다.』하시었다.
아~아! 이 한편의 상소에서 공이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 사교를 배척하고 정의를 부식하는 학문, 효도를 권장하고 윤리를 두텁게 하는 덕성, 곧은 말로 엄숙하게 바로잡는 도가 모두 지성으로 간곡한 충심에서 나왔기에, 족히 백대의 임금에게 귀감이 될 만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승정원에 전교(傳敎)하기를「상소에 나를 꾸짖는 말이 많다」하고, 또 초야의 선비가 조정을 멸시한다는 등의 말로 크게 진노하여 장차 추국하려 했습니다. 이때 조정대신들로서 정창손(鄭昌孫), 한명회(韓明澮), 심회(沈澮),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이극배(李克培), 김겸광(金謙光), 윤호(尹濠), 서거정(徐居正), 허종(許琮), 한치례(韓致禮) 등이 모두「구언(求言)을 하고 죄를 준다면 언로가 막힐 것이니, 직언한 사람을 죄주는 것은 불가하다.」고 간언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경상도관찰사 이육(李陸)에게 명하여 혹심한 추국을 계속하였던 바, 공께서는 형옥중에서 억울하게 운명하셨습니다.그 후에도 나라에 재변이 날로 심하여, 한겨울에 우레가 울고 瘴霧(장무/毒氣 어린 안개)가 하늘을 뒤덮었을 때, 다시 구언(求言)하였으나 직언하는 사람이 없어 언로가 끊어졌던 것입니다. 임금이 언로가 끊어진 이유를 물었을 때 대사간 신말주(大司諫 申末舟), 사간 김심(司諫 金諶) 등이「공이 추국 당한 이후로 언로가 끊어졌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공의 묘소는 대구 수성구 고산곡 신좌원에 계시고, 배 웅천주씨(配 熊川朱氏)는 부사 휘 계자숙자(府使 諱 繼字淑字)의 따님으로 묘소는 쌍분입니다. 성균생원 서공(徐公) 실기(實紀)가 세상에 전하고 대구의 덕산서원에 배향되셨습니다.
공의 사적이 성종실록에 상세하게 거의 일편분량(一篇分量) 등재되어 있습니다
 

경의사(景義祠)(묘우)
유현문(維賢門)(내삼문)
충정당(忠正堂)(강당)
구인재(求仁齋)(동재)
존성재(存誠齋)(서재)
전사청(典祀廳)(관리사)
신도비각(神道碑閣)
덕산서원 사적비(德山書院 事蹟碑)
숭절문(崇節門)(외삼문)
남은(南隱) 의 척간소 (간신을 배척하는 상소문)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척간소]를 올린다
“ 옛날 한나라의 동중서가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즈음이 매우 두렵다.’ 라고 했는데지금 전하께옵서 즉위하심에 오직 바르지 못한 무리들이 전하께옵서 어리심을 틈타 시아를 가리는 일들을 획책 하고 있으니 전하께옵서는 혹 이를 살피셨습니까 ?-- 이로 말미암아 살펴 보건대 군사를 양성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령 뜻밖의 변란이 있을 때 전하의 신성한 무용으로 써 더욱 힘 쓸 수 있습니다,--- 전하의 밝은 지혜로 잠시라도 편안히 누워 계시지 말고 오직 마음을 크게 먹기를 바라옵니다. 재상을 뽑고 장수를 가림을 급선무로 삼아 혼란을 제압 하여 정사를 회복 하고자 하신다면, 저 바르지 못한 무리들이 어찌 허물을 고치지 않겠습니까 ? 전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계유정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군사를 양성하여, 어진 재상과 장수를 뽑아 혼란을 제압 하여 정사를 회복 하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서섭 선생의 충정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수양 대군의 무리에 의해 모함을 받아 유배를 당하였다.
이후 수양대군은 선위의 형식을 빌려 와위에 오르고 어린 단종을 상왕으로 앉혀 살게 하였다. 상왕을 복귀시키려던 집현전 출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의 문신과 성승, 유응부등 무신은 김질, 정창손등의 고발에 결국 실패하고 주동자 대부분사형을 당하였다.
이 사건에 의해 단종 또한 노산군으로 강등 되어 영월로 유배 되었고, 금성대군의 복위 계획 또한 실패로 돌아가자 서인으로 강등 되었다가 10월에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서섭 선생은 [문영월사변통곡]이라는 시를 지어 그 울분을 토로 하였다.
 
山公木落 日無光 (산공목락 일무광) - 산 쓸쓸하고 나뭇잎 지고 , 해도 빛을 잃고
痛哭家家考妣喪 (통곡가가고비상) - 집집마다 통곡소리, 부모상 당한 듯,
堪愧微臣生在世 (감괴미신생재제세) - 부끄럽도다, 못난 신하 세상에 살아 있으니
他時地下面何相 (타시지하면하상) - 훗날 지하에서 무슨 낯으로 뵈올까 ?
 
문종의 당부를 지켜내지 못한 신하로 살아남아도 부끄럽고 죽어서도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 선생은 [계자 손설(戒子孫說)]에서 “나는 재주 없는 사람으로서 조정의 반열에 올라 조정을 욕되게 하였는데, 이 나라도 불행하여 병자년의 변란을 만났구나, 차마 오늘날을 당하여 서산에 오른 백이숙제의 충절을 지킬 수 없었고 , 동해를 밟고 죽을 지언정 무도한 진나라 백성이 되지 않겠다던 노중연의 의리도 부지할 수 없었으니 그 살기를 도모한 죄 어찌 회피 하겠는가? 통곡하고 통곡한다. 우리 자손들은 하늘의 도를 따르고 땅의 이로움을 쫓아서 농사에 기꺼이 종사하라.” 라고 하며 자신의 불충과 아울러 자손들은 도가 없는 곳에 나아가지 말고 농사에 종사하며, 효로써 부모를 섬기며 자제를 엄하게 가르치기를 당부 한다.
선생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기록은 그가 남긴 몇 편의글 밖에 없었다. 이 몇 편의 글 역시 “ 이 상자를 열어보지 말라, 열어보면 큰 우환을 미칠 것이다” 라는 선생의 당부 때문에 의문 속에 있다가 400년이 지난 후 1924년후손 서의곤이 집 수리공사중에 시렁 위에 묶여 있던 상자가 떨어져 선생의 단종에 대한 충절로 가득한 유고임이 확인되었다 한다, 세상에 알려지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을 염려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