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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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봉람서원(鳳覽書院)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立岩面) 산해(山海)2동 봉감(鳳鑑)
   퇴계 이황(退溪 李滉)
   1602(선조 35)
   
   
   미복설
1602년에(선조 35)에 용담(龍潭) 권지(權誌)공은 송간 이정회, 삼산 박경문, 만취 권산립, 어천 김순룡 등과 퇴계의 학덕을 추모하여 봉람서원을 창건하고 원장을 역임하면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봉람서원은 영양(英陽)읍내에서 남으로 30리 되는 입암면(立岩面) 산해(山海)2동 봉감(鳳鑑)에 있었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을 제향 하던 곳이다. 이 서원은 선조 때 퇴계 선생의 문도인 송간 이정회(松澗 李庭檜)선생이 주창하여 1599(선조 32년 기해년)에 창건된 것이다.
선생은 퇴계 선생의 문인이요 족증손이며 참봉 이희안의 아들이며 송안군 이자수의 8대 손이다. 중종 36년에 주촌에서 출생하여 천성이 단정하고 엄하며 기질은 호탕하고 재주가 있어서 일찍이 퇴계 선생에게 수학하여 퇴계 선생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은 것을 알고 정약포, 구백담 양선생이 천거하여 부득이 벼슬길에 나섰다.
감찰(監察)을 지나 횡성현감(橫城縣監)을 제수하고 1592(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며 선생이 창의거병(倡義擧兵)하더니 1597(정유년)에 서애 류성용 선생이 본도체찰사(本道體察使)로 내려왔다가 송간 선생을 의흥가수로 제수 할 때 선생이 일심으로 봉직(奉職)하고 난중에 허다한 폐습을 일소하면서 지휘하다가 명병(明兵)이 대거 남하함으로 이에 안도감을 가지고 부득이 병으로 귀향하여 진보(眞寶)의 문암산수(汶岩山水)를 평소에 즐기고 사랑하더니 문암산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진성 일명 진보는 이 퇴계 선생의 선향이지만 학자들의 수학처가 없고 산수가 족히 선현들의 서원을 둘만한 곳이므로 인근의 장로들과 수의하고 옥동(玉洞) 서원을 창건하여 이 퇴계 선생을 봉안하게 되었다. 옥동서원은 그 후 사림에 의하여 주간 되고 춘추로 향사를 올리더니 다시 지명을 쫓아 봉람서원이라 개칭하였다.
그 후 1871(고종 8년 신미년)에 전국 서원 철거령이 공포되어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농토가 되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서원은 당시 영양이 진보현에 속했으며 현 입암면 산해동 봉감절이 있던 곳에 서원을 세웠다는 말이 전하여 오고 있다.
지금은 봉람서원이 소실되고 논으로 되었는데 그 주춧돌과 기왓장만이 이따금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봉람서원이 소실되고 논으로 되었는데 그 주춧돌과 기왓장만이 이따금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영양군지(英陽郡誌)

이황 (李滉 ; 1501~1570)
조선 중기의 중신으로서 이동설(理動說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이다.
 
좌찬성 식()7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1527(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중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선조 1)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그뒤 선조에게 정자(程子)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서명 西銘등을 진강(進講)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를 저술,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1570년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황의 학문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태극도설·주역등 주자학에서 중요시되는 글뿐만 아니라 주자어류 朱子語類·주자대전 朱子大全등 주자의 글을 평생 금과옥조로 여겨 깊이 연구했고, 이를 알기 쉽게 편집했다. 주자의 서한문을 초록한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20권은 그가 평생 정력을 바쳤던 편찬물이다.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로 대부분의 저술이 이때 이루어졌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천명도설 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으며 연평답문 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고 57세에 역학계몽전의 易學啓蒙傳疑를 완성했다. 58세에 주자서절요자성록 自省錄을 거의 완결하고 서()를 썼다. 59세에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하여 토론했는데 이 논변(論辨)66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62세에 전도수언 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계원명이학통록>의 초고를 탈고하여 그 서를 썼다. 이것은 명나라 황종희(黃宗羲)송원학안 宋元學案에 앞서는 것으로 주자학파를 중심으로 송대 이후 중국 유학사를 정통론적 입장에서 정리한 문헌이다. 64세에 이연방(李蓮坊)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李彦迪)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으며 심경후론 心經後論·양명전습록변 陽明傳習錄辨을 지었다. 68세에 성리학의 주요문헌에 나오는 개념을 유기적으로 구성하여 핵심적 교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성학십도, 70세에 마지막 작업으로 사서석의 四書釋疑를 편찬했다.
 
이황의 성리학은 정자와 주자가 체계화한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보다 풍부히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를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主宰)하는 우주의 최종적 본원이자 본체로서 규정하고 현상세계인 기()를 낳는 것은 실재로서의 이라고 파악했다. 그는 주자의 이해와는 달리 기와 마찬가지로 이가 동정(動靜)하고 작위(作爲)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가 동정하지 않고 작위성이 없다고 한 종래의 이론은 이의 체()의 측면이고 그 용()의 면으로 말하면 이 또한 동정하고 작위하는 성질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이와 기의 관계는 이주기종(理主氣從이존기천(理尊氣賤)의 구조를 가지며, 이는 기보다 절대적·우월적인 것이 된다. 이황의 이러한 이기론의 구조와 특성은 심성론(心性論)에서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심()이 성(<span style="letter-spacing: 0pt; backgrou

봉람서원은 훼철되고 그 목재를 가지고 남경대를  지었다.
 
남경대(攬景臺)
남경대(攬景臺)는 용담(龍潭) 권지(權誌, 1567~1637)1615(광해군7) 영해도호부사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 1569~1631)의 권유와 건축비 부담으로 반변천 강안 남경대 절벽 위에 대지를 마련하여 정자를 짓고, 좌우 산수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하여 남경대라 하였다. 권지는 임진왜란 때 이곳 이웃 마을인 북면 후평리에 피난하여, 용담정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한 적이 있으므로 남경대 주변은 익숙한 지형이었다. 아들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과 손자 권태시도 이곳을 별장으로 활용하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권태시가 죽은 뒤 남경대는 폐허가 되었는데, 1817(순조17)경 권태시의 6대손 권상도(權尙度)가 사림에 폐허 참경을 알려서 1827(순조27) 권지, 권창업, 권태시 3대의 학행을 추모한 영남사림에서 남경대 중건계(重建契)가 조직되고, 이로부터 약 100년 후에 사림대표 정건모(鄭建模), 조진용(趙晉容), 권한모(權翰模), 신익호(申翼浩), 오석준(吳錫浚) 등이 주도하여 3년간의 건축공사로 훼철된 봉람서원(鳳覽書院)의 기와와 목재로 1916년 남경대를 중건하고 춘추로 계회를 하였다. 그 뒤 1993년에 후손에 의하여 남경대가 새로 건축되었다.
 
위의 사진은 남경대 사진이다.
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 1542~ 1613
본관은 진성(眞城)이고 자는 경직(景直)이다. 내관직으로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선온서주부(宣醞署主簿)를 역임했고 외관직으로는 횡성현감(橫城縣監), 의흥현감(義興縣監)을 지냈다.
1581(선조 14) 신복이란 자가 친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안동부가 안동현으로 강등되었다.. 유운용, 안몽렬과 함께 상소하여 현으로 격하된 안동을 부로 회복시켰다. 1587년 사은사 배삼익의 수행원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은둔할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진보 문암산의 산수를 사랑하여 거기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으며,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세워 퇴계 이황을 제사했다.
 
 
산해리
산해리는 안동시 임동면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마을에 속한 자연부락을 지나는 마을이다. 낙동강의 동쪽원류인 반변천과 소하천인 동산천의 두 냇물이 합하여 호수와 같은 큰 내를 이루었으니 마치 산 속의 바다를 연상하게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동산(東山)과 문해(汶海)의 이름을 따서 산해라고 한 것이다.
본래 진보군 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문해동,춘감동,신천동,주파동,삼산동의 일부와 안동군 임동면의 동산리를 합하여 영양군 입암면에 들게 하였다.
최근 이곳 산해리에서 민간 제작용 고려청자가마터가 발견되어 경북문화재연구원에서 수습발굴조사를 시행한 바 있다.
산해리에는 10여개의 자연부락이 속해 있는데, 대개 마을의 지세에 따라 부락의 명칭이 정해졌다.
산해리에 중심이 되는 마을인 문해동(汶海洞),문해(汶海),무내는 반변천과 동산천 두 냇물이 합쳐지는 곳이기 때문에 물이 많아 문해라고 하였다.
문해 서쪽의 긴 골짜기에 있는 마을인 동산태,동산(東山),동산동(東山洞)은 옛날 안동현이 속했을 때, 동산령 너머 마을이라 하여 동산동으로 불리워졌으며, 윗마을을 동산태, 아랫마을을 아랫동산태라고 한다.
문해 북서쪽 둔덕에 위치한 배두들,주파(舟坡),주파동(舟坡洞)은 안동김씨가 약 200년 전에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모양이 배의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는 가득차면 가라앉는다고 해서 살림이 일면 사람들이 이곳을 떠난다는 말이 전해진다.
동산동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랫동산,하동산(下東山)이라고 불리워지는 마을은 그 아래로는 문해가 이어지고 있다. 주파와 동산동 그리고 문해를 잇는 세 갈래 길이 있으며 현재는 산해3리이다.
문해동(汶海洞) 서남쪽에 위치한 봉감(鳳鑑,鳳甘),봉감동(鳳鑑洞,鳳甘洞)은 송간(松澗) 이정회(李廷檜)가 약 500년 전인 1602년 이곳에 서원을 창건하여 옥동서원(玉洞書院)이라 하였으나 그 후 봉감서원(鳳鑑書院)이라 개칭되었다. 지금은 봉감서원이 소실되고 논으로 되었는데 그 주춧돌과 기왓장이 이따금 발견되고 있으며, 국보 제187호인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이 자리 잡고 있다.
산해마을에는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가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반변천 가에 세운 남경대(攬景臺)와 봉감사(鳳鑑寺) 터에 남아있던 벽돌로 쌓은 봉감모전오층석탑, 그리고 송간(松澗) 이정회(李廷檜)1602년 이곳에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창건하여 퇴계를 배향하다가 뒤에 터만 남은 서원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