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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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운곡서원(雲谷書院)-미복설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감천1동
   회암 주문공(晦庵 朱文公), 우암 문정공 송시열(尤庵 文正公 宋時烈)
   1780년(正祖 4)
   
   
   미복설
운곡서원은 1780(선조 4)에 영양(英陽) 감천(甘川)1동에서 세워졌다. 이 마을은 선조조 칠원현감 낙안 오시준(漆原縣監 樂安 吳時俊)선생의 자손들이 세거하는 화수촌이며 순후 화목하였다.
이 서원의 주향은 회암 주문공(晦庵 朱文公)을 사향하고, 종향으로 우암 문정공 송시열(尤庵 文正公 宋時烈)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사우는 모두 13간인데 중간 마루를 묘우로 하고 좌우에 서실을 두어 학자의 수업에 편리하였다. 이 서원에 우암 선생의 위패를 모신 관계로 우암을 숭배하는 사림에서 왕래가 빈번하였으나, 그 당시 남인들은 향사에도 출입이 없었으며 주자를 모신 관계로 주자가 살던 곳인 운곡을 따서 서원 이름을 지은, 군내에 노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서원이었다.
이 서원이 들어서자 학자의 왕래가 빈번하고 지방 풍속과 교육에 공헌함이 컸으나. 1871(고종 8)에 대원군 서원 철거령에 의하여 철거되고 지금은 옛터가 녹지대로 변하였다.
윤광안(尹光顔)1757(영조 33)1815(순조 15)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복초(復初)이고 호는 반호(盤湖)로 유()의 증손이고 동미(東美)의 아들이다.
1775(영조 51) 생원이 되고, 1786(정조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리를 거쳐 대사간·대사성·충청도관찰사·이조참의·부호군 등을 역임하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그가 재임 때에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한 영양 운곡서원(雲谷書院)의 사당을 헐고, 영정을 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유생들의 분노를 사서 올해 32일에 태학의 유생들이 윤광안이 주자 영당을 훼절한 일을 상소했고, 413일에는 경상 감사 정동관이 윤광안을 탄핵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415일에는 관학 유생 677인이 상소하여 윤광안의 죄를 논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1808(순조 8) 암행어사 이우재(李愚在)의 탄핵을 받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죄명으로 함경도 무산부에 유배된 적이 있다.
송산재 뒷편에는 운곡서원(雲谷書院) 옛터 표지석이 서있다. 운곡서원은 1780(정조 4)에 주자와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였고, 서원의 품격을 갖추며 지방의 풍교에 공헌을 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뒤로 터만 남게 되었다. 이에 2007년에 표지석을 세워 간략한 내용을 기록하고, 기념하고 있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1) 주희(朱熹, 1130~ 1200)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朱子)라는 존칭으로도 불린다. ()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등 여러가지가 있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했으며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맹자, 공자 등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주돈이, 정호, 정이등의 유학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진의를 밝히고 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주희는 주렴계, 정주로 대표되는 이전 송학의 흐름을 이어받아 이를 집대성하고 종래 유교가 불,도에 비해 사상적인 약점이었던 이론적 결여를 보완하는 우주론적, 인간론적 형이상학을 수립하게 된다. 이로써 한당의 훈고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고자 했다.
이후 주자의 철학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주도 이념으로 자리잡는다. 사후 문공(文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다시 휘국공(徽國公)에 추봉되었다. 주돈이의 학통을 계승한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문인이다.
 
2) 송시열 (宋時烈 ;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노론(老論)의 영수(領袖로서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영보(英甫)이다. 그리고 호는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명은 성뢰(聖賚)였다.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갑조(甲祚)이고,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효종 즉위와 더불어 대거 정계에 진출해 산당(山黨)이라는 세력을 형성했던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과 함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26세 때까지 외가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살다가 회덕(懷德)으로 옮겼다.
1633(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간여하지 않았던 서인세력)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 ·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1)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
미복설
황룡과 청룡
영양읍에는 황룡과 청룡 두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황룡은 등천을 하였으나 청룡은 등천을 하지 못하여 고민하는 것을 현감과 지역주민의 힘으로 등천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황룡은 지금의 황룡리에 머리를 두고 영양읍을 관통하여 흘러내리는 황룡천(복개공사가 진행중임)을 말하고, 용의 꼬리는 지금의 시외버스 정류장 아래의 구부러진 개천을 말하고 있다.
지금은 직선으로 하천이 정리되어 있지만 30년 전만 하더라도 구불구불 돌아서 흘려 내려가고 있었다. 속칭 개마라고 불리워진 곳이다.
청룡은 영양의 진산인 작약산(함박산)을 머리로 하여 서남방향의 능선을 따라서 행곡령(청기면과 영양읍의 경계점인 팔수골의 정상근방)을 지나서 진막골 뒷산을 따라서 이어내려와 군부대 앞에서 양양읍으로 들어가는 커브길의 왼쪽끝이 청룡의 꼬리가 된다.
어느날 새로운 현감이 임지인 영양에 부임하기 위하여 일행이 감천리의 앵가리다리를 건너 운곡서원 하마비 앞에서 잠시 쉬었다가 영양을 향하여 능선을 올라가다가 현감일행의 발이 움직이지가 않았다. 일행의 앞에는 거대한 구렁이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현감이 구렁이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가?”하고 물으니 구렁이는 나는 영양에 살고 있는 청룡이다. 나의 소원이 하나있으니 이 소원을 풀어준다고 약속하면 길을 비켜 주겠다.” 하였다. 현감이 사연을 말하라고 하니 청룡은 나의 친구인 황룡은 꼬리에 힘이 있어서 이미 등천을 하였으나, 나는 칼산이 나의 등을 누르고 있어서 아직까지 등천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등천할 수 있도록 현감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최선을 다하여 해결하여 준다는 현감의 약속을 받고 청룡은 길을 비켜 주었다. 관아에 도착하여 밤에 잠을 자던 중 또다시 청룡이 꿈에 나타나서 칼산은 행곡령상단에서 남쪽으로 뻗어있는 산이다.” 라고 말하고 사라져 버렸다. 지금의 영양중고등학교 서편의 산이다 산의 끝이 송영당 입구까지 뻗어 있다. “조산대도 이 산의 화마를 방지하기 위하여 심은 나무라고 한다. 이튿날부터 현감은 청룡의 등천을 도와주기 위하여 지역원로를 비롯한 주민들과 깊은 숙의를 하였다.
별로 뾰족한 방안도 없어서 고민하였으나 결론적인 대안은 청룡을 위한 재를 올리고 칼산의 봉우리에 주민들이 다수 올라가서 대형 연에 청룡을 그려서 수십개의 연을 제작하여 날려보내는 의식을 하도록 하였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지역주민들이 칼산에 올라가서 청룡을 그린 대형 연을 날려 보내는 의식을 계속한 다음부터는 현감의 길을 가로막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70년 전까지만 해도 이 행사가 계속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