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의건(李義健)
1533(중종 28)∼1621(광해군 1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峒隱). 세종의 다섯째아들인 광평대군 여(廣平大君璵)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배천군수 수한(守漢)이며,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뒤에 학행으로 돈녕부직장이 되었으나 친상으로 곧 사직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 이항복(李恒福)의 주청으로 공조좌랑이 되고, 이어 공조정랑에 올랐으나 사퇴하였다.
그는 당시의 명유들과 교유하며 시명을 떨쳤고, 후학의 양성에 전력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광주(廣州) 수곡서원(秀谷書院)과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은유고》가 있다. 그의 글씨는 광평대군 여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2) 조속 (趙涑)
1595(선조 28)~ 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취옹(醉翁). 아버지는 병조참판 수륜(守倫)이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1627년(인조 5) 덕산현감을 거쳐 장령·진선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양함으로써 청표탁행(淸標卓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기도 했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금석문을 수집하여 이 방면의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그림에서는 묵매·영모(翎毛)·산수에 능했는데 특히 금강산과 오대산을 비롯한 명승을 두루 다니며 사생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유작들 중에는 공필풍(工筆風)의 〈금궤도 金櫃圖〉(국립중앙박물관)와 남종화풍이 깃들어 있는 〈호촌연의도 湖村煙疑圖〉(간송미술관) 등도 있지만 그보다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까치와 물새를 소재로 한 수묵화조화와 묵매 등에서 격조높은 개성을 발휘했다. 성글고 까칠한 붓질과 야취(野趣) 어린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화조화풍은 아들인 지운(之耘)을 비롯하여 전충효(全忠孝)·이함(李涵)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노수서작도 老樹棲鵲圖〉(국립중앙박물관)·〈매작도 梅鵲圖〉(간송미술관) 등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3) 이후원(李厚源)
1598(선조 31)~ 1660(현종 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 · 남항거사(南港居士). 아버지는 군수 욱(郁)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가해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지고 태인현감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1635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지평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主和論)을 극력 반대하고, 청과의 강화과정에서 세자를 인질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극간(極諫)하는 등 척사론(斥邪論)을 펼쳤다. 효종이 즉위한 후 북벌계획에 앞장섰으며, 1650년(효종 1)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에 밀고하자 그의 죄를 논해 부처(付處)하도록 했다. 1653년 도승지로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655년 예조판서로서 추쇄도감(推刷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해 강화(江華)를 방비하게 했으며,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 樂學軌範〉을 다시 간행해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했다. 이듬해 이조판서로 있을 때는 청탁하는 사람이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등 공정한 인사에 힘썼다. 1657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1659년 자의대비(慈儀大妃) 복제문제가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광주(廣州)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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