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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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충현서원(忠賢書院)-미복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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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영당마을
   강감찬, 서견, 이원익
   1658년(효종 9)
   1676년(숙종 2)
   
   충현서원지(경기도 기념물 제80호)
조선시대 금천현(뒤에 시흥군) 서면 오리동(뒤의 소하리).
현 광명시 소하동 영당마을에 있는 서원터로서, 오리 이원익을 배향한 서원이다.
이원익의 시호는 문충으로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흥의 충현서원, 여주의 기천서원, 안주의 청천사 등에 제향되었다.
이 서원은 원래 삼현사(三賢祠)라 했으나 조선후기부터 충현서원, 충현사 등으로 불려왔다.
이곳에는 이 고장 출신인 고려시대의 대사 강감찬의 신위를 중심으로 좌우에 고려시대의 장령(掌令)서견(徐甄)과 조선시대의 공신 이원익의 신위를 각각 봉안하였다. 그런만큼 이곳 일대의 대표적인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원익은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퇴해 살면서 처음에는 이곳 금천현의 촌로들과 상의하여 강감찬, 서견 두분을 기리는 이 현사를 건립하려 하였다.
그런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였다.이후 효종 9년(1658)이 고장 유림들이 오리 정승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자 사당을 세워 이원익도 함께 배향하고 삼현사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노력한 결과 숙종2년(1676)왕이 사액(賜額)하였다.
이후 조선후기 정조 때 사액서원으로 충현서원이 건립되었고, 철종7년(1856)에 개축되었다.
그러나 현재 서원 건물은 없어지고 주춧돌 일부만 남아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훼되었는지는 알수 없다.
이 서원이 위치했던 지역은 이원익의 옛 집이 있던 곳으로 서원터 아래에는 [탄금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있고 이전에는 [관감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민가형식으로 지은 기와집 건물 바깥채만을 전에 있는 정자의 아름을 따서[관감당]이라는 당호를 붙여 놓았다.
관감당 뒤편에는 이원익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7세기 경에 건립되었다고 하는 [오리 영우]1동이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이다.

1)  강감찬(姜邯贊, 948~ 1031)은 고려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다. 강이식의 후손으로,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금주(지금의 낙성대)에서 태어났으며,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요나라의 침입을 세 번 격퇴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은 검교태위 문하시랑에 이르렀고, 작위는 천수현개국자작(天水縣開 國子爵)에 봉해졌다. 무관으로 알려졌으나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 장군이었다.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고, 본관은 금주(衿州) 또는 진주이다.
강감찬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의 아들로 금주에서 고려 제3대 정종 9481119일에 경기도 금주(현 서울시 금천구 낙성대 근처)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선조는 수에서 고구려로 귀화한 고구려 장군 출신 강이식이었다. 성종 때인 983년 갑과에 장원 급제하고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8(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 행영 도통사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20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 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혼란에 빠진 요나라 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 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 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에 봉해져 식읍 5백 호를 받은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에 봉해지고, 식읍 1천 호를 받았다.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현재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문종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2)  서견(徐甄) - 한국 충신(고려 문신.충신.처사)
고려 후기의 문신. 초명은 반(), 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여와(麗窩) 또는 죽송오(竹松塢).
  일찍이 안향(安珦:12431306)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1369(공민왕18)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391년 사헌장령(司憲掌令)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의 건국과 관련하여 정몽주(鄭夢周)강회백(姜淮伯)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상소하여 혁명세력인 조준(趙浚)윤소종(尹紹宗)오사충(吳思忠) 등을 탄핵하다가 정몽주가 격살당하자 김진양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함에 따라 금천(衿川)으로 은둔하였으며, 한 때는 이색(李穡)원천석(元天錫)길재(吉再) 등 고려의 절신(節臣)들과 함께 정선(旌善)에 모여 시와 술로 서로를 위로하며 고려를 사모하였다.
선조 때 대사간에 증직되고 충신묘에 봉해졌으며, 충현서원(忠賢書院)삼현사(三賢祠)에 신주가 모셔지고 또 두문동서원과 경현사(景賢祠)에 제향되었다. 그는 일찍이 원천석범세동(范世東)탁신(卓愼) 등과 문답하여 동방사문연원록 東方斯文淵源錄을 저술하고, 화해사전 華海師全을 편집하였으며, 현전하는 시문은 고려를 그리워한 한시와 자신을 고죽(孤竹)에 비긴 시조가 각 1수씩 남아 있을 뿐이다.
1369~공민왕18년 문과에 급제
1391~사헌장령(司憲掌令)
 
3) 이원익([李元翼)
1547(명종 2) 서울~ 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청빈한 생활을 했으며, 병제와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6번제(六番制)와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공헌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치()의 4세손이며, 함천부수(咸川副守)를 지낸 억재(億載)의 아들이다. 15세에 4학 중 하나인 동학(東學)에 들어가 수학했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정자·저작 겸 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聖節使)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황해감사이던 이이(李珥)의 천거로 1575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왔다. 그뒤 교리·수찬·지평·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583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불화로 승정원이 탄핵을 받자 자신만이 파면을 면할 수 없다고 하여 5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민생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후 이러한 공로에 힘입어 형조참판, 대사헌, 호조·예조 판서, 이조판서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안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을 선도하고 군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
1593년에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한 공으로 숭정대부가 되었으며, 1595년에는 우의정 겸 4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 명나라에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로 다녀와 영의정이 되었으며 그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했다. 1600년에는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지방과 서북지방을 돌아보았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인목대비 폐위론이 제기되자 강력하게 반대 상소를 올려 홍천을 거쳐 여주로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으며,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에 반대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왕의 호위를,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도체찰사로 세자의 호위를 맡았으며, 서울로 와서는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고령으로 기력이 쇠약해져 사직하여 낙향한 후에는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다.
그는 안주목사로 있을 때 농민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병졸들의 입번(入番)을 4번에서 6번으로 하여 1년에 2개월씩 근무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색인 : 6번제). 이 제도는 그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또한 그때까지 누에를 칠 줄 모르던 안주지방에 누에치기를 가르치고 장려해서 안주에서는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또한 그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했다. 즉 1608년(광해군 즉위) 영의정으로 있을 때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거두되 중앙에 선혜청을, 경기도에 경기청을 두고 방납(防納)의 폐단이 가장 심한 경기도에 한하여 우선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 인조 묘정, 여주 기천서원(沂川書院), 시흥 충현서원(忠賢書院), 안주 청천사(淸川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암반 설중 고죽이야- 徐甄(서견)
巖畔 雪中 孤竹이야 반갑기도 반가왜라 묻노라 孤竹君이 네 어떠하던인다 首陽山 萬古 淸風夷齊를 본 듯 하여라
 
술회(述懷)-서견(徐甄)
마음을 적다-서견(徐甄)
千載神都隔漢江(천재신도격한강) : 천년의 신도가 한강 넘어에 있는데
忠良濟濟佐明王(충량제제좌명왕) : 충직하고 어진 이들 나란히 밝은 임금 도왔도다
統三爲一功安在(통삼위일공안재) : 삼국을 한 나라로 만든 공이 어디 있는가
却恨前朝業不長(각한전조업불장) : 전조의 업적이 길지 못함이 도리어 한스럽도다
 
서견묘표(徐甄墓表)
! 이곳은 고려의 충신 장령 서선생(徐先生)의 무덤이다. 선생의 휘는 견()이요, 이천인(利川人)이다. 공양왕 4(1392)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간관이던 김진양 · 이확 등과 함께 조준 · 정도전 · 남은을 치죄하라고 청하였는데, 포은이 순국함에 이르러 선생과 함께 말한 사람들을 한 패거리로 여겨 모두 벼슬에서 내쫓았다. 그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선생은 금천에 숨어 지내면서 앉을 적엔 북쪽을 향하지 않았고, 일생을 마칠 때까지 한양의 성곽을 대면하지 않았다.
일찍이 시를 지어
 
천년을 누려온 신도가 아득한 곳에 있어,
많고 많은 충신과 현량들이 어진 임금을 도왔네.
삼한을 통합한 공은 어디에 있느뇨?
전조의 왕업이 길지 못한 게 한스럽구나!
 
하니 대신과 대간들이 공을 국문하자고 청했으나 우리 태종대왕은 하교하기를, “서견은 고려의 신하로서 자신이 섬기던 임금을 잊지 않으니 또한 백이·숙제와 같은 인물이다.”라고 하고는 그를 관리로 임명하고 국문하지 말라 하였다. 그 뒤 선조대왕은 경연에 참여한 신하의 주청으로 인하여 그의 묘에 봉분을 올리라고 명하고 또 제물을 하사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금천의 번당리에 있는데, 금천현의 소재지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금천현감으로 재임하고 있는 이제원이 선생의 묘소에 가서 절을 하고는 슬픈 어조로, “충신의 묘에 묘표가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고서 석재 하나를 마련하여 선생의 묘소 앞에 세우고자 하면서 자신의 뜻을 아버지인 이재에게 고하니 그의 아버지는 그 얘기를 듣고 기뻐하면서, “옛날에 주부자께서 장사에 부임하였을 적에 맨 먼저 절의를 지키다 죽은 다섯 사람을 표명하여 그들의 사당을 세웠는데, 네가 그 의미를 안 것 같구나. 선생은 일신으로써 오백년 동안의 인륜을 붙들어 세웠으니 포은과 더불어 생사는 비록 다르지만 인을 행한 것은 한 가지이다. 가히 일월과 빛을 다툴 만한데 도리어 그의 사적이 희미하여 밝힐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선생이 자신의 지조를 이야기한 시만큼은 가히 선생의 본심을 백세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상상하여 볼 수 있게 한다. 대체로 백이와 숙제의 사람됨을 살피려 하는 자는채미가하나면 충분하거늘 또 어찌 반드시 사적이 많아야만 하겠느냐? 네가 임지로 돌아가거든 이 말을 묘비의 뒷면에 새겨도 좋겠구나.”라고 하였다.
숭정갑신년 후 99년째인 계해년(영조 19, 1743) 8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이재 기록함
통훈대부 행홍문관응교 윤심형 글씨를 씀
 
徐甄墓表
嗚呼 此高麗忠臣掌令徐先生之墓也 先生諱甄 利川人 恭讓四年爲掌令 與諫官金震陽李擴等 請罪趙浚鄭道傳南誾 洎圃隱殉國 以先生及諸言者爲黨與 悉放流之 是年高麗亡 先生遯居衿川 坐不北向 終其身 不對漢陽城郭 嘗作詩曰千載神都隔杳茫 忠良濟濟佐明王 統三爲一功安在 却恨前朝業不長 大臣臺諫請鞫之 我太宗大王敎曰 甄高麗之臣 不忘其君 亦夷齊之流也 其署勿問 後宜祖大王因筵臣言 命封其墓 且賜祭 墓在衿之樊塘里 去縣治十里餘 今縣監李濟遠往拜之 慨然曰 忠臣之墓 其可無表乎 爲具一石 將竪之墓前 以告于其父縡 縡聞而喜之曰 昔朱夫子之任長沙 首錄死節五人 立其廟汝其知此義矣 先生以一身而扶樹五百年倫常 與圃翁 生死雖殊而爲仁則一 可以爭光於日月 顧事蹟微昧 無可徵信而獨其言志之作 猶可以想見先生本心於百世之下 夫欲觀夷齊者 采薇一歌足矣 又何必多乎哉 可歸而刻諸表陰也
崇禎甲申後九十九年癸亥 八月 日
資憲大夫議政府左參賛 李縡 記
通訓大夫行弘文館應敎 尹心衡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