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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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경행서원(景行書院)-미복설
   강원도 동해시 송정동
   김효원(金孝元), 허목(許穆)
   1631년(인조 9)
   
   불향
   
인조9(1631) 삼척시 북정산밑에 건립되었으며, 당시는 삼척부사를 역임한 김효원을 봉안하는 경행사였다. 현종 2(1661) 북정산 서쩍 기슭으로 이전되었으며, 순조 24(1824) 삼척부사 면사판이 경행사를 중수하고 확장하여 경행서원으로 운영하였다. 아울러 삼척부사를 역임한 허목을 배향하였다. 경행서원이 송정동으로 이전된 것은 순조 28(1828)이었으며, 헌종 3(1837)강원관찰사 한익상이 강단을 창건하였다. 고종 5(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며, 이로서 위패는 송정동 화랑포 북쪽에 매장하고 학전과 서책을 비롯한 제반 학구는 삼척향교로 이관되었다. 이후 경행서원은 복원되지 못하였다.
경행서원은 부사 김효원이 오금잠을 불태워 버리고 오금잠 굿을 금지시킨 뒤 삼척사람들이 성리학적 질서의 틀에 자리잡게된 것을 추모하여 16312월에 교리 북정산에 세운 경행사(景行祠)30년 뒤 16612월 북정산 서쪽 산마루로 옮겼다가 1824년 삼척부사 민사관이 중수하여 허목을 추배(追配)하여 경행서원(景行書院)으로 승격된 것인데, 1828년 송정동으로 이전하고 1837년 관찰사 한익상이 강당을 신축하고 유생을 교육한다.
홍순성은 1994년 펴낸 동해촌 사기에서 "이와 같이 서원을 자주 옮긴 이유는 서원이 있는 마을의 젊은이들이 많이 요절해 마을 사람들이 이축을 강요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혀 놓았다. 만약 서원 주변 마을 젊은이들의 요절과 서원의 존재와 무슨 관계가 있다면, 오금잠을 소각하고 오금잠제를 음사로 폐지했던 김효원 부사와 향약을 제정 시행하고 민폐를 끼친다고 지역 토호 수십 명을 구속한 허목 부사에 대한 깊은 원한이 있어서 송정지역으로 옮겼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고을 수령을 중심으로 유교윤리의 확립 곧 향촌의 운영질서를 확립하려고 향약의 시행과 오금잠제 강제폐지, 고분고분 수령의 말을 듣지 않는 지역 인사들을 대거 잡아넣은 2명의 부사 김효원과 허목 위패를 봉안한 경행서원이 송정으로 이전한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는 것을 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18689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송정동에서도 자취를 감춘다. 경행서원이 없어진 것을 안타깝게 여긴 삼척출신 향토사학자 김진원씨가 사비를 들여 기적비를 세웠다.

1) 김효원(金孝元, 1532-1590).
157512-15784월까지 삼척부사로 근무.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庵), 본관은 선산(善山). 현감 김홍우(金弘遇)의 아들.
조식과 이황에게서 학문을 공부하였고 1565(명종 20) 진사 합격을 발판으로 관직에 입문함. 병조좌랑(兵曹佐郞, 6), 정언(正言, 사간원 정6) 지평(持平, 사헌부 정5)을 역임하였고, 1573(선조 6)에 요즘 교수들의 안식년제와 같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다가 이조좌랑(吏曹佐郞, 6)에 임명되어 일할 때 동인(東人)의 대표로 서인(西人)의 대표 심의겸과 반목하다가 밀려나 삼척부사를 거쳐 영흥부사 재임 중 별세한다.
1576년에 성황사의 오금잠(烏金簪)을 불태우고 성황위패를 만들어 유교식 제()를 단행하였다. 오금잠 소각을 15765월 단오가 지난 직후로 추정하는 이유는 적어도 부사 김효원이 오금잠제를 직접 목격하고 나서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1578년에 부친상으로 사직하였다. 향교 동쪽에 경행사(景行祠)를 세웠고 송정으로 이전했다가 18689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된다. 198910월 향토사학자 김진원이 1989년 김효원과 허목 두 부사를 기리기 위해 삼척문화예술회관 뒷산인 남산에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2)허목(許穆)
1595(선조 28)~ 1682(숙종 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남인으로 17세기 후반 2차례의 예송(禮訟)을 이끌었으며 군주권 강화를 통한 정치·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화보(和甫문보(文父),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
아버지는 현감 교()이며, 어머니는 임제(林悌)의 딸이다. 1615(광해군 7) 정언옹(鄭彦)글을 배우고, 1617년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624(인조 2) 경기도 광주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피난하여,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1646년 고향인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왔다. 1650(효종 1) 정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했고, 이듬해 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을 청했다. 그뒤 사복시주부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60(현종 1)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당시 집권세력인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주장한 기년복(朞年服1년상)에 반대하고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주장했다.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그도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에 있는 동안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쓰는 한편, 정체전중설 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서인의 주장에 따라 정해진 대공복(大功服9개월)의 모순이 지적되어 앞서 그의 설이 옳았다고 인정됨에 따라 대공복은 기년복으로 고쳐졌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675(숙종 1) 덕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의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론을 주장하여 온건론을 편 탁남(濁南)과 대립,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 사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예궐했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이듬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교육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