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朴恒 1227~1281)
춘천 신북읍 발산리에서 태어난 고려시대 인물 박항(朴恒) 선생(1227~1281)은 춘천박씨(春川朴氏)의 중시조로 자는 혁지(草之), 초명은 동보(東甫)이며 시호는 문의(文懿)다.
나이 18세에 문과에 급제한 선생은 한림원에 등용된 후 충주목사, 경상·전라 안찰사, 우언정, 국자감 관리, 중추원 승선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중서문하성 평장사(정2품)에 이어 삼중대광(정1품)에 올랐다.
선생은 평소 모든 처사가 공명정대했으며 성품이 관대하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효심이 지극했던 인물로 칭찬이 자자했다.
원나라가 2차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1만명의 군사와 군자금, 군수품을 강요할 때 원나라 황제와 직접 교섭해 출병 출자를 최소화했다. 또 원나라의 감독관으로 온 원수(元帥) 흔도(熊都)와 우승(右丞) 홍다구(洪茶丘)의 행패가 심하자 충렬왕에 진언해 원나라 세조에게 국서를 보내 충렬왕을 좌승상(左丞相)·행중서성사(行中書省事)에, 金方慶을 정동도원수(征東都元帥)에 임명하게 해 흔도·홍다구의 횡포를 견제하게 했다.
국내정치에서도 과거제도를 통한 인재 발탁 등 인사행정제도를 공정하게 개혁했으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실천했다.
이처럼 선생은 대내적으로 무인정권기를 거쳐 왕정복고가 이뤄지는 혼란한 시기를 현명하게 대처했으며, 대외적으로 몽고의 침략과 이후 영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련기를 외교적인 역량으로 극복한 인물로 후대에서는 평하고 있다.
한편 선생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고종 40년(1253년) 몽고군이 춘천 봉의산성까지 침입했을 당시 춘천지역민들은 끝까지 항전했지만 끝내 패하고 말았다. 때문에 지역민들의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선생의 부모 또한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춘천으로 급히 와 부모의 시신을 거두려 했지만 찾지못하자 전사한 시신 300여구 모두를 장사지내주었다는 일화는 7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효의 의미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있다.
하지만 선생은 안타깝게도 충렬왕 7년(1281년) 5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문장에도 뛰어난 것으로 전해오나 현전하는 문집은 없으며 시 3수만 남아있다. 고려 공민왕 21년(1372년) 정몽주의 상소로 선생의 충효와 애국치적이 높이 평가돼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젊은 선비들이 찾아오는 것만도 고마운데
눈길에 술을 들고
싸리문을 들어서는구나
이것은 글자그대로
마음에 이어짐이라
석잔술을 마시고나니
어느덧 취하는구나
춘천은 옛부터 살기좋은 곳이라 하였는데
지신령도 이를 따라
영재들을 모으시니
후배들은 노력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고향선배 박찬성의 뒤를 이어주기 바라네
- 박항 詩 '춘천유생' 中 에서
춘천시 신북읍 윗샘밭을 지나 오음리로 넘어가는 배후령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朴恒선생의 묘소는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과 삼악산이 에워싸며 생전의 국·내외적으로 눈부신 활약만큼이나 장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