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창 정제의 백학서원 풍영루 중수 기문(1761년 소작)
(백학)서원의 부임(부원장)인 이매씨가 사림(士林)들의 뜻으로 와서 말하기를 '풍영루를 중수하고 공사가 끝났으니 원하건대 한 말씀으로 기문을 삼고자 합니다'라 하는데
나를 돌아보면 글재주도 없는데다 나이가 들어 쇠약하고 늙어 정신과 지혜가 황폐하니 어이 능히 그 필요한 바에 부응하겠는가 하여 머뭇거리며 굳이 사양하는데 (기문을)청함이 더욱 근직하였다.
(그리하여)시험 삼아 지나간 일들을 살펴보니 가정34년(서기1552년) 을묘에 금계 황준량 선생께서 신녕 고을 현감이 되었을 때 특히 백학산의 높고 빼어나 전망이 빼어나며 깊숙하여 고요함을 사랑하여 공무(公務)를 본 여가에 이 곳에 올라 유람하며 즐기다가, 드디어 고을의 여러 분들과 도모하여 이에 몇 칸의 정사(精舍)를 지어 그것을 학문을 갈고 닦는 장소로 삼았다.
밭(위토)을 두고 창고를 지어 스님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널리 선비들과 아이들을 모아 특별히 교양(敎養)을 베풀 되 법도가 있게 하고, 언제나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에는 강의(강론)하는 자리에 엄숙하게 임하게 하여 떼 지어 모여 토론하고 도의(道義)를 갈고 닦는다. 한 지역의 고요하고 외떨어진 곳이 몇 년이나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두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유림(儒林)들의 글을 외우고 노래하는 곳이 되었으니, 이 산이 선생을 만남 또한 어이 우연이었겠는가?
장차 옛날의 녹동(鹿洞중국 최초의 서원 이름)의 백학산과 천년이 지난 후에 나란히 아름다우니 화산의 한 지역이 가히 한번 변하여 노나라(魯 공자의 고국인 노나라. 즉 성인의 나라)로 된 것이다.
금계 황준량은 실로 퇴계 이황선생의 빼어난 제자인데,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 우러러 품의하여 (서당의)이름을 여쭈었더니 퇴계 선생께서는 '백학서당'이라 명명하시고 손수 (백학서당 이라는)넉자의 큰 글자를 쓰셔서 편액 하셨다.
이에 공은 스스로 서문을 지어 그 일들을 기록하고 또한 시 세편과 도산서원의 학규(學規)로써 학문을 권장하고 권면하는 본보기를 부치셨으니, 두 분 선생의 유학을 진작하시는 하나의 방법의 뜻이 성대하지 않겠는가?
이듬해인 병진년 겨울 선생께서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셨지만 남기신 서당이 예전과 같으므로 고을의 선비들이 황준량 공이가신 후에도 사모하는 마음이 이에 미상불 애타게 그리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재가 되어버려 편액과 학규는 없어져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러나 홀로 시판(詩板)만이 어느 선비의 집에 온전히 남아 있어 이로부터 한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서원이 있던 옛터가 잡풀에 우거짐에 대하여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어 언제나 (사당을)중수함으로 뜻을 삼지 않음이 없었다.
만력 40년(1912. 광해4) 임자년에 고을의 유지인 김득우 공이 맨 먼저 의논을 내어 (서당을 중수 할)재목을 모으고 기술자들을 모집하여 옛 집을 갱신하니 포사(관리사)와 묘우가 환하게 일신되었기에 드디어 두 분 선생의 제사 드림이 논의 되었지만, 그러나 다만 땅이 한 곳에 치우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 (사당)지음이 어려웠다.
효종조 무술년(1658)에 이양욱씨가 사림들과 의논하여 옮길 곳을 정하되 옛(사당)터의 북쪽 5리쯤 되는 오도리로 하였는데, 그 땅의 맑고 빼어남이 백학산보다 못하지 않았다.
인하여 백학산의 옛 이름(백학서당)으로 서원을 건립하여 관리사와 창고 그리고 포사를 먼저 이루었다. 기유년(1669)에 이성춘이 강당을 만들고 정사년(1677)에 이동석이 사당(묘우)을 만들었으며
이듬해 무오년(1678)에 조영하씨가 널리 도내 유림(선비)들을 맞이하여 3월의 두번째 정일(丁日)에 드디어 이선생(퇴계)을 봉안하고 이로써 금계 황준량 공을 종향(從享)하였다.
서당(백학서당)으로부터 나아가 서원이 되고, 문하의 제자로 인하여(즉 황준량) 선사(퇴계)를 좆아 제사 드리니 소요하시던 향기 남긴 땅이 끝내 제사 드리는 곳이 되어, 많은 선비들의 크게 사모하는 정성으로 드디어 드높이 받드는 예를 이루었다.
봄가을 제사 드림에 번다한 의식이 깨끗하며 선비와 벼슬아치들 떼 지어 살면서 주선할 곳이 있으니, 즉 그 우러러 사모하는 도리가 거의 유감이 없구나.
그러나 만일 답답한 가슴을 풀고 정신과 기운을 펼치려면 반드시 높은 다락의 위태로운 난간과 바람 부는 기둥과 서늘한 집이 있어야 옮겨 기대며 멀리 바라 볼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다락 없음을 한할 것이다.
신사년(1701)에 한 고을이 모두 도모하여 많은 선비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에 강당의 남쪽에 다락을 만들되 기둥 넷을 하고서 편액하기를 '풍영루'라 하였으니, 이로부터 모든 선비들이 이 다락에 오를 때 그 상쾌하고 즐거움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고 해가 쌓여 바람에 쓸리고 비에 떨어져 장차 무너지는 걱정이 있었다.
지금의 임금님 재위 중이신 신사년(1761)에 김휴와 이매 권달경이 고을 어른들의 뜻으로 이에 중수를 도모하니 선비들은 즐거워하고 백성들은 모여든다. 우뚝하니 재차 새롭게 하기를 서까래가 짧은 것은 부연을 달아 길게 하고, 기둥이 아래로 쳐진 것은 돌을 깎아 이었더니 장엄하고 웅장하며 높고 크면서 빛이 난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불현듯 생소한 듯도 하지만 그 서원의 집들이 이로 인하여 또한 깊고 엄격해질 것이므로 여러분들의 고생과 마음 씀에 그 공이 어찌 크다 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다 해도 서원이 반드시 앞선 시대의 현인께서 향기를 뿌리신 땅으로 나아가 사당을 세워 높여 받들고 재사(齋舍)를 만들어 선비를 기름은 대개 남기신 가르침을 사모하여 보고 느끼고자 함이라
앞사람의 자취를 밟아 본보기로 하여 후학(후배)들로 하여금 떨쳐 일어나게 하는바가 있다면 우리의 도가 추락하거나 잃어버리지 않을 진대, 하물며 풍과 영자의 두 글자는 대개 증점이 '기수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쇠고'자 하신 남긴 뜻에서 취함에리오?
풍영루의 편액을 반드시 이것으로 한 까닭은 그 뜻함이 더욱 깊은 것이다. 대저 증점은 성인(공자)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큰 뜻을 보았기에. 그러므로 바야흐로 기수에서 목용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쇨 적에 세속의 때(더러움)를 모두 없애버리고 하늘의 이치만 유행하여 초연히 요임금과 순임금의 기상이 있었으니, 풍과 영 두 글자를 어찌 가히 사모하고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이 다락(풍영루)은 산이 감싸 안고 물을 껴안아 땅은 그윽하고 지역이 고요하니, 만일 따스한 봄날에 헌함(난간)에 기대어 바람을 맞으며 가슴 속 생각을 읊조리고 생각을 내 놓음은 진실로 가히 사람마다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증자가 시를 읊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뜻에 이르러면 진실로 속세의 더러움을 깨끗하니 벗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가히 얻을 수 없으리니, 반드시 그 모습을 천고의 위(아득한 옛날)를 상상하여 묵연히 한 마음의 가운데서 만남을 기다려 사람으로 하여금 터럭만큼이라도 마음속에 머물거나 붙여두지 않게 함은 비단 한 때의 적합함만을 취함은 아닌 것이리니, 여러 군자들은 어찌 아니 또한 (풍영루라는)이름을 돌아보고 의로움을 생각치 않으리오? 이것으로 기문으로 삼노라
白鶴書院風詠樓重修記(원문)
書院副任李君梅以其士林之意來曰院之風詠樓重修訖工願得一言以記顧余不文年紀衰耄神識荒落何能副其所需逡巡固辭請之愈勤試按其故昔在嘉靖三十四年乙卯錦溪黃先生之爲縣也特愛白鶴山之高絶而爽塏幽邃而靜閒薄牒之暇登臨遊覽顧而樂之遂與縣中諸子謀乃架數椽精舍以爲藏修之地置田設廩留僧以守廣集章甫冠童異列敎養有法每於佳辰美景講帳儼臨衿佩坌集討論書史琢磨道義一區荒閒絶境幾年隱藏於天慳地秘之中而一朝忽爲儒林絃誦之場玆山之遇先生亦豈偶爾哉將與古之鹿洞鶴山匹美於千載之下花山一境庶可以一變至魯矣錦溪公實退陶門下高弟也嘗以此仰稟於師門請其品題則先生命名曰白鶴書堂手書四大字以扁之於是公自爲序文以記其事又以三篇詩及陶山學規寓其獎勉表率之方兩先生振作一方之意顧不盛歟越翌年丙辰冬先生解歸而遺堂依舊則邑士去後之思未嘗不眷眷於斯也龍蛇之變沒爲煨燼扁額學規蕩然無存而獨詩板得全於士人之家自是一鄕人士莫不慨恨於遺址之棒蕪每以重修爲意萬曆四十年壬子鄕老金公得禹倡議鳩材募工更新舊堂庖舍齋宇煥然一新遂有兩先生俎豆之議而秖以地偏境絶難之孝廟戊戌李公陽郁議於士林移卜舊址之北五里許吾道里蓋地之淸勝無讓於白鶴山也仍白鶴舊號以建書院廚廩庖舍先成己酉李公成春作講堂丁巳李公東碩建廟翌年戊午曺公永夏廣延道儒以三月中丁遂奉安李先生以錦溪黃公從祀蓋自書堂而進爲書院以門弟而從享先師杖屨遺馥之地竟爲尸祝之所多士景慕之誠遂成崇奉之禮春秋薦芳縟儀蠲潔衿組群居周旋有地則其於瞻仰之道庶無憾焉而若夫宣暢湮鬱發敍神氣則必待夫高樓危欄風楹凉軒徙倚眺望不得不以無樓居爲恨也辛巳一鄕僉謀多士會議乃於講堂之南作樓四楹扁之曰風詠自此諸儒登臨之際其快樂何如哉而歲久年積風掣雨剝恐有傾覆之患也今上辛巳金公休李君梅權君達經以鄕父老之意乃謀修改士樂民赴突兀重新椽之短者婦椽以加之柱之下者斲石以承之翼翼渠渠輪焉奐焉回視舊日頓覺生顔而院宇因此亦增其深嚴諸公之辛勤用意者其功詎不大歟雖然書院之必就前賢播芬之地立廟而尊奉建齋而養士者蓋欲慕遺風而觀感焉蹈前軌而矜式使後學有所振起吾道無所墜失而況風詠二字蓋取曾點浴沂水風舞雩之遺意也樓額之必以此者其旨尤其深矣夫曾點遊聖人之門見得大意故方其浴沂而風雩也物累消盡天理流行超然有堯舜氣象則風詠二字豈非可慕而可效者耶今是樓也山擁水抱地幽境寂若其和煦之時憑軒引風詠懷放情固可人人而能之至於曾氏詠歸之意則苟非脫略於塵汙者不可得也必須像想於千古之上黙會於一心之中使人欲無一毫留著於靈臺不但爲一時取適而已諸君子盍亦顧名而思義哉是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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