密陽都護府使겸 淸道助戰將 박경신(朴慶新)선생
▣ 머리말
1592년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쟁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피란하기에 급급하였으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나라와 민족을 굳건히 지킨 많은 의병들이 있었기에 7년의 전쟁에도 버틸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당시 왜적이 서울로가는 중요한 길목인 경북 淸道와 경남 密陽지역을 목숨 걸고 지켜낸 三友亭 朴慶新 선생의 충절을 재조명함으로써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물론이고 후손들에게도 국가 보전의 중요성과 역사적 교훈이 되고자 한다.
三友亭 朴慶新 선생은 전투에서는 충성심이 불같았고 집안을 위해서는 모든 식솔과 여러 諸從들과 많은 가동(머슴, 하인)들에게 자애로운 어버이였고, 전투에서는 용감한 장수로서 싸움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三友亭 朴慶新 선생이었다.
1592년 임진년, 선생은 휴가차 와 있던 고향에서 왜놈들의 침략소식을 듣고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했을 뿐 아니라 선조 임금의 피난길을 호종(扈從)하고 왜적들이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서 선생은 밀양도호부사와 청도조전장으로서 오랜 전투에서 쌓인 피로누적으로 밀양도호부사 관아에서 순직하는 충절을 남겼다.
선생이 남긴 전투일기를 기록한「창의일록」은 淸道·密陽지역의 교전 상황과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의 전쟁에 임한 태도 등을 잘 알 수 있다.
선조임금께서 선생에게 하사한 임란1등공신 녹훈과 포상문서인 절지수 등 4종 17점이 1996년 1월 19일 정부로부터 문화재 보물 1237호로 지정되었고, 선생의 위패는 淸道郡 錦川面 林湖書院내 景義祠와 淸道郡 伊西面 龍岡書院의 忠烈祠에 봉안되고 지금까지 유림에서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1. 선생의 생애
가. 성장과정
선생의 휘는 경신(慶新)자(字)는 중선(仲宣), 호는 삼우정(三友亭)이다.
1539년 9월 9일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서 태어나 1545년 7세가 되던해 봄에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의 할아버지 逍遙堂(휘 河淡)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할아버지와 도의지교로서 맺은 당대의 거유 三足堂 金大有 선생과 警齋 郭珣 선생으로 부터 글을 배웠다.
15세때 이미 사서삼경과 무경칠서에 통달함으로써 선생을 청도 서면에서는 성동(星童)이라 부르고, 동면에서는 호동(虎童)이라 불렀다.
1561년 선생의 나이 2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스스로 호를 삼우정(三友亭)이라 하였다. 선생이 호를 삼우정이라 한 것은「부모님께서 우리 삼형제를 낳으시고 기르시느라 온갖 고생하셨는데 우리 삼형제도 산 앵두나무 꽃처럼 하나로 뭉쳐 피어나고 참쑥처럼 잘 자라서 부모의 은공에 보답하고 삼형제 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고자 내 號를 삼우정(三友亭)이라 짓고 그 까닭을 기문으로 밝혀두는 바이다」라고 하고 있어 선생의 효심과 형제간을 사랑하는 절절한 심정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나. 벼슬 관계
1565년 27세때 아들 쌍둥이(지남 智男, 철남 哲男)가 태어나고, 1569년 식년시 무과 초시에 급제하고 난 후 東岡 金宇顒과 寒岡 鄭逑를 방문하여 도의지교를 맺었으며 또 藥圃 鄭琢을 찾아가 스승으로 받들었다. 1570년 32세때 무과 복시에 급제하고 1573년 35세에 무과전시(武科殿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함으로써 훈련원 적순부위 참군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1574년 여절교위훈련원주부, 다음해 현신교위훈련원판관에 승진하여 선천 병마첨절제사종사관, 1579년 정략장군훈련원첨정으로 승진하여 安東 병마동첨절제사에 임명된 선생은 자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는데「무릇 명예에 집착하여 한 고을을 다스리게 되면 주민들에게 폐를 끼치게 마련이다. 특히 물질적인 욕구에 굴복하여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마침내 스스로가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스림에 있어 가장 우선해야할 일은 자기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욕심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한 것을 보면 주민을 위한 정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청렴하고 선정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1585년 양근 병마동첨절제사, 1589년 선생의 나이 51세에 건공장군 훈련원부정에 승진하였다.
1590년 함경북도 종성에 갔다 오는 길에 圃隱 鄭夢周 先生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사당을 알묘하고 옛일을 돌이켜보며 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로 완성된 영정이 봉안된 사당을 알묘하니 포은 선생의 모습에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생전의 절의가 엄숙하여 우러러 쳐다뵙니다. 선생의 절의를 흠모하는 선비가 이 나라 도처에 많은데 그 중의 한사람인 저가 가까이 지나는 걸음이 있어 이렇게 찾아뵙고 변변치 못한 주포로서 배례를 올리오니 보잘 것 없는 작은 정성이나마 굽어 유향하소서」
1592년 4월 29일 건공장군훈련원부정에서 통훈대부 어모장군훈련원 정으로 승진되었고, 1593년 4월 1일 통정대부절충장군겸 첨지중추부사에 승진되어 行 淸道助戰將과 겸직으로 行 密陽都護府使에 임명되었고 1593년 윤11월 20일에 가선대부에 승진되었다.
다. 관직에서 휴가를 얻어 귀향
1591년 3월 선생의 나이 53세때 서울 남산(목면산)에 올라가 성안을 바라보며「지난날 잘못된 일들이 이제사 비로소 깨달아지니 관복을 벗고 벼슬길에서 물러나야겠구나 본래부터 내가 고관대작을 꿈꾼것은 아니었는데 공명을 더 누리다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게되면 어떡하나 차라리 내일이라도 도성을 이별하고 雲門山 숲속에서 아담하게 지어놓은 고향집으로 돌아가 냇가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편안한 마음으로 유유자적하리라」하며 시를 남기고 그 동안의 관직생활을 되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5월 휴가를 얻어 섶마루 자택으로 돌아와「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사슴이랑 학이랑 벗 삼고 노닐기로 다짐하니 세상살이에 찌든 때 묻은 마음은 산마루에 피어오르는 뜬 구름이 사라지듯 흩어지고 그윽한 흥취가 샘솟듯 감돌아 냇물 흐르듯 끝이 없어라」하며 망중한을 달랬다.
1592년(임진) 2월에 선생은 경북 청도군 이서면 水也里의 고향집에 가서 3월에 숙부(휘 이(頤)) 소상을 치루고 돌아오는 길에 동생 慶因을 섶마루로 데리고 와서 지병인 창질을 고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등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있던 중 4월 별안간에 왜놈의 침입으로 부산포가 함락되는 등 온 나라가 급격한 소용돌이에 빠졌다.
2. 임진왜란과 선생의 창의일록(倡義日錄)
가. 임란초기 청도 지역 전황
선생께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와 전투 과정을 기록한「창의일록」을 남겼다. 장서기 이기옥(李璣玉)이 정리한 창의일록은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유일한 정본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이 함락되고 14일에 동래성이 함락되어 東萊府使 宋象賢이 전사하고 17일에 密陽이 함락되고 20일에 淸道가 무너졌다.
淸道는 왜적이 침범하여 서울로 진격해 가는데 꼭 필요한 길목이다. 鳥嶺과 秋風嶺 남쪽은 마침내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무너져 왜적은 두 길로 나누어 한패는 조령을 경유하고 한패는 추풍령을 경유하여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나라안이 온통 야단법석이 되어도 그 왜적을 상대하는 자가 없고 왜적 무리를 물리칠 의지가 없고 또한 너무 별안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할 겨를이 없었다. 그때 巡察使 金晬는 후퇴하여 진주성에 머물고 청도군수 裵應褧은 적을 피해서 대구에 숨어버리고 좌병사 李珏은 병사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진격하지 못하고 우병사 曺大坤은 웅천에서 싸워 패배한 장수가 되엇다.
이 때 朴慶新 선생은 왜적이 청도읍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솟구치는 눈물을 씻고 소매 자락을 걷어붙이며「임금이 욕을 보게 되었는데 신하가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일어났다.
나. 倡義준비
4월 20일 선생께서는 두 아들 지남·철남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기로 의논하고 편지로서 청도군 서면일대에 살고 있는 여러 제종(諸從)들을 불렀다. 그 편지에서 말하기를「이번에 왜적 오랑캐들이 쳐들어와서 청도읍성을 점령하게 됨에 따라 군민들이 심한 혼란에 빠져 모두 피난하느라 분주하니 이와 같은 때에 우리집안 식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스럽다. 비록 읍내 사람들이 피난처를 찾아 숨는다 할지라도 여러 제종들은 달아나 숨는 경거망동을 일삼지 말아야 한다. 내말을 따르면 여러 대에 걸친 우리 가문의 조상을 받들고, 또한 우리 집안의 어른과 어린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바는 너희들과 더불어 의병을 조직하여 청도에 쳐들어온 왜적을 물리칠 계략을 강구해 놓고 나는 임금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리려 달려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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