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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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문연서원(文淵書院)-미복설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죽연(竹淵) 박윤(朴潤), 낙락당(樂樂堂) 박택(朴澤), 월오(月塢) 윤규(尹奎), 학암(鶴巌) 박정번(朴廷璠), 매헌(梅軒) 최여설(崔汝楔)
   1695년(숙종 21)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문연서원 터문연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학암(鶴巌) 박정번(朴廷璠)의 강학지소(講学之所)로 건립하여 죽연(竹淵) 박윤(朴潤), 낙락당(樂樂堂) 박택(朴澤), 월오(月塢) 윤규(尹奎), 학암(鶴巌) 박정번(朴廷璠), 매헌(梅軒) 최여설(崔汝楔)의 5현을 향사(享祀)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훼철하였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후손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그 업적을 기록한 문연서원 유허비가 있다.

1) 낙락당(樂樂堂) 박택(朴澤)
고령인(高靈人) 계조(繼祖)의 셋째 아들로서, 자는 봉부(奉夫)고 호는 낙락당(樂樂堂)이다. 1521년(중종 16년)에 출생하였으며, 덕행이 겸비하여 효도가 뛰어났으며 학문에 밝아 명서을 멀리 떨쳤다. 남명(南冥) 조식선생과 낙천(洛川) 배선생과 동의로서 사귀었으며, 명종 21년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우곡면 사전동에 있으며, 낙천배신이 비명을 짓고 좌당 곽수구(郭壽龜)가 문연서원(文淵書院)에 입향 봉안문(入享 奉安文)을 지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배신(裴紳)과 교우하여 도의가 높고 효성과 덕행이 뛰어나며 학문이 넓었다.
 
2) 학암(鶴巌) 박정번(朴廷璠)
박정번(朴廷璠)[1550~1611]은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송암(松庵) 김면(金沔) 진영에서 의병 참모로 모획(謨劃) 활동을 하였다. 도진(桃津) 마을 뒤 개산포전투(開山浦戰鬪)를 사실상 주도하여 가형(家兄) 박정완(朴廷琓)과 가동(家僮)을 이끌고 승리하였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친척으로 정유재란 때에는 함께 화왕산에 입성하였다. 선조 때 예빈시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난이 끝나자 문연서당(文淵書堂)을 열어 후학들을 육성하였으며, 학암정(鶴巖亭), 부래정(浮來亭)을 지어 경상우도의 여러 의병들과 함께 어울렸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대암(大庵) 박성(朴惺), 존재(存齋) 곽준(郭䞭), 여헌(旅軒) 장현광(張顕光) 등과 교우하여 도덕과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김면 등과 창의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은 사양하였다.

 
3) 월오(月塢) 윤규(尹奎)
윤규의 휘(諱)[죽은 사람의 이름]는 규(奎)요, 자는 문노(文老)이다. 관향은 파평인으로 고려 시중 문숙공(文粛公) 윤관(尹瓘)의 15세손이다. 조선 선조 때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월오촌에 은거함에 마을 앞에 대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언덕 위에 기암괴석이 심히 아름다워 평생 외루(畏塁)하였다.
매헌(梅軒) 최여설은 양천인 최원호(崔源護)의 아들로 정구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전공을 세워 여러 차례 요직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고 초야에서 지냈다. 이러한 다섯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양천최씨 오현세적비를 세우고 문연서원에 배향하여 매년 향사하였다.

 
박윤(朴潤)[1517~1572]은 남명(南冥) 조식(曹植), 낙천(洛川) 배신(裵紳) ,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월오(月塢) 윤규(尹奎) 등과 교우하며 학문을 닦았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극진한 슬픔으로 효성을 보였으며, 홀로 된 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특히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네 형제가 한집에 살았는데, 사사로이 재물을 쌓지 않아 다투는 일이 없었고 부인들 또한 화목하게 지냈다. 어머니가 병들자 인분을 맛보며 병세를 살폈고, 82세에 세상을 뜨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예제(禮制)를 다하였다.
 
5) 매헌(梅軒) 최여설(崔汝楔)
최여설(崔汝契, 1551~1611)의 자는 순보(舜輔)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그는 1551년(명종 6년)에 아버지 원(鶴谷, 源)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구(鄭逑)의 문인이었고, 벼슬은 선조 때 장사랑 훈도(將仕郞訓導)에 제수되었다. 부친 최원의 명으로 남명선생에게 수업하게 되었다.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의 군에 참가하였다. 금산성(錦山城), 대장산성(大壯山城), 초계(草溪) 등지의 전투에 박정번(朴廷璠), 이득춘(李得春)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향사 :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636년(인조 14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문연서원(文淵書院,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에 있던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되었다.


1) 문연서원유허비
문연서원 유허비는 비석의 전형적인 형태로 귀부와 비신, 직사각형의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신의 전면에 ‘문연서원 유허비(文淵書院遺墟碑)’가 크게 음각되어 있고 삼면에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크기는 비신의 경우 높이가 185㎝, 폭 70㎝, 두께 37㎝이며, 이수는 높이 85㎝, 폭 104㎝, 두께 56㎝로 이수에는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 용이 조각되어 있다. 귀부의 거북은 생김새나 모양이 조금 미숙한 느낌이 든다.
문연서원 유허비가 위치한 앞쪽에는 4기의 비석이 있는데, 왼쪽부터 도계 박기언공 교행비(桃渓朴基彦公教行碑), 증 숙인 함안조씨 정려 유적비(贈淑人咸安趙氏旌閭遺蹟碑), 증 이조참판 양죽당 박공 기적비(贈吏曹参判養竹堂朴公紀蹟碑), 죽연 박선생 효행 정려 유허비(竹淵朴先生孝行旌閭遺墟碑)이며, 도진 마을에 죽연 박윤죽연정사(竹淵精舎)낙락당 박택낙락당(樂樂堂)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도진리고령박씨 집성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연서원 유허비는 이들 4기의 비석에 밀려 뒤쪽에 배열되어 있으나 주변이 깨끗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