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촌(杜村) 박양무(朴楊茂)
자는 약생(若生), 호는 두촌이다. 고려 공민왕 때 선무랑(宣務郞)을 거쳐 김천(金泉) 도독우(道督郵)를 지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을 종유(從遊) 고려의 운명이 다함을 슬퍼하여 벼슬을 버리고 만수산 골짜기로 퇴거하였다. 뜻을 함께한 제현(諸賢)들과 은둔하다가 낙향하여 화양 대성산에 은거하여 성학(聖學)을 강마(講磨) 후인을 양성하였다. 정헌(正軒) 이종상(李鍾祥)의 봉안문에 공의 의열(義烈)은 야은(冶隱) 경곡(耕谷)과 짝이된다고 하였다.
2) 화은(華隱) 박계은(朴繼隱)
호는 화은이다. 세종 때 문학과 덕행으로 나라에서 추중(推重)되고 온 사림(士林)이 긍식(矜式)하였으므로 후학으로부터 더욱 존경되었다. 고계(高溪) 이휘영(李彙寧) 당향 조문에 ‘ 경학은 가문을 이었고 문아(文雅)한 풍조는 나라에 떨쳤네. 신안에 고려(古廬)를 정하시니 남쪽의 선비들이 선생의 인격을 표준으로 삼았네’ 라고 하였다.
3) 호재(湖齋) 박맹문(朴孟文)
호를 호재라 하였다. 성종 때 순천(順天) 교수(敎授)로 직제학(直提學) 최연(崔淵)과 교유하며 문명을 얻었다. 상향 축문에 ‘학문은 두루 소통하였고 덕행은 돈독하여 이륜(彛倫)을 밝혔네. 국왕이 교수에 임명하니 아름다운 은혜가 후인에 미치네’라고 하였다.
4) 농암(聾巖) 박란(朴鸞)
자는 운경(雲卿) 호는 농암(聾巖)이다. 중종 때 진사를 지내며 향도 사림에 공헌한 업적이 현저하였다. 1541년 신축년에는 향로당(鄕老堂) 현판과 향로당 기문을 쓰고 향규(鄕規) 18조를 지었다. 일찍이 삼족당 (三足堂) 김대유 (金大有) 선생과 경재(警齋) 곽 순(郭珣),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선생과 문유하며 의례(儀禮)를 강론하였다. 만념에는 이서 칠곡인 오수곡(吾守谷)
에 정사를 지어 회양정거(晦養靜居)하며 덕행을 펼쳤다. 고계의 당향 축문에는 ‘ 소학의 공을 떨쳐 대현(大賢)들이 그 덕에 감화되는 구나. 기미를 붙잡고 가슴을 풀어내니 그 은혜가 향숙(鄕塾)에 미치는 구나’ 라고 하였다. |